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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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계서원(華溪書院)|
   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 365번지
   손 기남(孫 起南)
   1726년(영조2년)
   
   음력 3월 첫째일요일
   
화계서~1.JPG

돈암공(遯巖公) () 손 기남( 起南)을 모시기 위하여 1726 (영조2)에 창건되었다가 1868(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7(광무1丁酉)에 당시 의흥군수(義興郡守) 신 태철( 泰哲)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현재 생존해있는 밀양손씨 후손들의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의 서원 철폐당시 선조들 집집마다 화계서원의 주요목재(기둥과 대들보 및 석가래등)를 감추어 두었다가 새로 복원하여 숭덕사(崇德祠) 모성당(慕聖堂)으로 개칭하여 현재 보존하고 있으며 밀양손씨 (密陽孫氏) 돈암공파(遯巖公派) 종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를 지낸다.

(公)의 휘(諱)는 기남(起南)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돈암(遯巖)이고 자는 문선(文善)이다.
신라 국효(國孝) 손순(孫順)을 시조(始祖)7世孫인 고려 건국 (建國) 벽상공신(壁上功臣) (諱) 긍훈(兢訓)광리군(廣理君)및 고려 중기 19세손인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문전(修文殿) 대학사(大學士) 정당문학(政堂文學) 동수국사 (同修國史) 상장군 (上將軍) 밀성군(密城軍) () (斌)後孫이다.
(公)의 증조부 휘(諱) (義)는 평택현감(平澤縣監) 이었고 조부 휘() (番)은 승의랑(承議郞) () 선릉참봉 (宣陵參奉) 이었고 부친 휘(諱)풍정(豐貞)은 장사랑(將仕郞) (行) 정산훈도(定山訓導) 였다.
(公)1539(중종34己亥)에 군위군(軍威郡) 의흥면 (義興面) 금양(錦陽)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학문(學門)과 충효(忠孝)에 큰 뜻을 품었으며 성품이 강개(彊慨)하고 인의 (仁義)를 겸비한 유현(儒賢)이었다. 선조25년 공(公)의 나이 54세 때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양란(兩亂)으로 강토 (彊土)가 왜구들의 만행으로 짖밟힐때 공(公)은 개탄 (慨歎)하며 말하기를 내가 벼슬이 없으니 병마(兵馬)를 지휘할수 없고, 군인(軍人)이 아니니 직접 칼을 들고 싸울수 없는 실정 이다. 선비의 몸이 되어 어찌 성현(聖賢)의 혼령(魂靈)을 적() 이 지른 불길 속에서 타는 욕(辱)된 모습을 보고만 있겠는가! 이에 집으로 가서 어버이 훈도공(訓導公)에게 이 뜻을 아뢰고 향교(鄕校)가 불에 타고 있을 무렵 분연(憤然)히 몸을 날려 향교에 들어가 몸소 오성위판 (五聖位版)을 짊어지고 의흥현 (義興縣)의 동쪽 선암산 (船巖山) 성재암 (聖在巖)에 모셔놓고 밤낮 보살피며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분향(焚香) 하였고 연로하신 어버이를 업고 사림산(士林山) (鳥林山 이라고도 함)으로 가 움막을 치고 무려 8년간을 병란을 피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도 감복하여 노루를 잡아다주어 어버이를 공양하였고, 公이 밤새 위판권안소 (位版權安所)를 지킬 때에는 호랑이가 동행 호위하였다고 의흥군수(義興郡守) 신태철(申泰哲) 이 찬(撰) 하였다. 병란이 끝나자 의흥 향교는 불에 탔어 재(灾) 가 되었으므로, 할수없이 용연정(龍淵亭)(의흥면 원산2리 위천 보 (洑)에 설치된 수문(水門))을 지어 그곳에 오성위판 (五聖位版)을 모시면서 산나물을 캐고 과일을 따서 향사 (享祀)를 지냈다. 그 후(後) 향교(鄕校)를 새로 짓고 위판 (位版)을 환안(還安)하니 위판(位版)의 색깔은 변색(變色)없이 완전하였다. 선조32(서기 1599己亥)에 수사(繡使) 민후홍 (閔候弘)이 전후 사실을 알고 임금께 장계(狀啓)를 올리니 임금께서 불러 복호(復戶) 4(四結)을 즉석에서 내리니 께서는 복호(復戶) 4(四結)은 신(臣)에게너무 과하니 2결은 나라에 되돌려 받치니 임금께서는 너는 나라에 충신(忠臣)이요, 부모에게는 효자(孝子)이며 성문(聖門)에게는 어진 제자(弟子)다 하면서 어사주(御賜酒)를 내리셨다.
성현(聖賢)의 교리(敎理)가 정녕 보람이 있어 그 빛남이 해와 별과 같음을 돈암(遯巖) 행적(行蹟)이 다시 말해주는 것이다. 만력(萬曆) 丁未年(서기 1607)에 증직(贈職)으로 통정대부 (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재감첨정 (司宰監僉正)이 되었고, 숙종(肅宗) 기묘년(己卯1699)에 특별히 사당짖기를 명(命) 하여 사림(士林)에 화계사(華溪祠)를 짓고 향사(享祀)를 지내니 모성(慕聖)하는 정신(精神)은 나생(羅生)과 정복(鄭僕)의 몇 배(培)나 되었다.
만력(萬曆) 선조39(丙午서기 1606)(公)이 별세(別世)하니 향년 (享年) 68세였다.
위패(位牌)는 화계서원(華溪書院)에 모셔졌다가 대원군 (大院君)의 서원 훼철후 숭덕사(崇德祠)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셔졌다. 그 후에 정문입사령(旌門入祠令)이 내리기도 했다.
현재 의흥향교에 모시고 있는 오성위판은 임진왜란당시 손공 (孫公)8년간 선암산(船巖山)에 피난하였던 위판(位版)으로서 경상도내에서는 당시의 위판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유일한 원판이라고 경상북도 관광문화체육과의 경북문화재자료에 실려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뒤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司)를 비롯하여 앞에는 강당인 모성당(慕聖堂)을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자리배열을 하였으며 돈암선생유허비(遯巖先生遺墟碑)와 오성위 판권안소(五聖位版權安所)인 선암산 성재암(聖在巖), 오성위판을 권안(權安)하고 사용했다는 손정(孫井)(손 장군 우물), 모성효의 비각(慕聖孝義碑閣), 모성효의비각은 의흥향교(義興鄕校)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돈암선생 실기목판 (實記木版) 23점 중 21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으며 2점은 慶北 軍威郡廳內 있는 군위숭덕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돈암선생 실기목판 (實記木版) 23점 중 21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으며 2점은 慶北 軍威郡廳內 있는 군위숭덕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참고: 한국국학진흥원 http;//www.koreastudy.or.kr
군위군립숭덕박물관 httf;//www.gunwi.go.kr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