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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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석계서원(石溪書院)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이 예(李 藝)
   1737년(영조 13)
   
   (음력) 9월 9일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17호(2000.11.09지정)
1737년(영조 13)에 도(道) 유림의 공의에 의해 황용연(黃龍淵) 위에 용연사(龍淵祠)가 창건되어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를 배향하였으며 1782년(정조 6) 웅촌 석천리로 이건되어 사호(祠號)를 석계라 하였다. 1860년(철종 11)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고종5) 훼철되었고 1900년(광무 4) 9월 9일 설단하여 그후 매년 9월 9일 향사를 봉행하여 왔으며 1915년 경수당(敬守堂)과 필동문(必東門)이 중건되었고 2002년 9월 9일 설단을 훼철하고 복원하여 매년 음력 9월 9일 향사를 봉행하여 왔다.

1)주벽-이예(李藝, 1373∼144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학성(鶴城). 호는 학파(鶴坡). 원래 울산군의 기관(記官) 출신인데,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 등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았다. 1401년(태종 1) 처음으로 일기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그 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 찾아오고, 벼슬도 여러 번 승진해 호군이 되었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中軍兵馬副帥)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1422·1424·1428년에는 각각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 등으로, 1432년에는 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1443년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대마도에 가서 잡혀간 포로 7명을 쇄환해오고 왜적 14명을 데리고 왔다. 그공로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승진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명으로 다녀온 것이 모두 40여 차례나 되었다.
 
그간 대마도주를 회유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고 또한 문인제도(비자제도)를 확립하여 왜인들의 입국을 통제하였으며 1443년 계해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의 발달된 문물인 자동물레방아, 병선모방건조, 광물 자유췌취, 국방에 긴요한 화통과 완구를 무쇠로 제조 하는 방법, 사탕수수재배와 엽전유통, 상가진열등의 모방을 임금에게 건의하여 내치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인쇄술과 저서, 불교서적등을 일본에게 전파하는 등 문화교육에도 노력하였다. 저서로 “학파실기”가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2005년 2월 1일 문화광관부에서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바가 있으며 2010년에는 외교통상부에서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다.

건축물(문화재 제17호)은 울산지역에서 보기 드문, 조선시대에 건축된 건물로서 건축적 특징을 보면 뒷마루에 더붙인 쪽마루 형태의 진입부가 특이하고 장초석(長礎石)등의 세부 수법이 주목할만 하다. 그래서 2002년 복원시 사당과 내사문, 강당, 필동문, 동제를 신축하되 기존경수당을 서제로 필동문을 남문으로 활용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형으로 적절하게 활용하여 복원하였다. 재천정은 후면부에서 진입하는 방식으로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곁에 있는 독락당(獨樂堂)의 계정(溪亭)과 유사하다. 이 서원의 경수당과 재천정은 부재수법 및 평면형식에서 볼 때 조선 후기 양식으로, 건축사적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