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강서원(鷗江書院)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2동 171-1
   정몽주(鄭夢周) 이언적(李彦迪)
   1678년(숙종 4)
    1694년(숙종 20)
   陰 2月· 8月 中丁
   
구강서원은 조선시대 울산지방의 최초 사립교육기관으로 1659년(효종 10)에 사림 배두첨(裵斗瞻) 외 11명이 창건 발의가 있은 후 3차에 걸쳐 사림 55명이 공동출자하여 1678년(숙종 4)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1동 290번지일원(서원부락)에 건원하였다.
향사할 인물은 영천 출신 정몽주(鄭夢周)와 경주 출신 이언적(李彦迪)으로 정하였다. 정몽주는 울산의 속현인 언양에 2년간 적거(謫居)하였고, 이언적은 이웃 경주에 거주하여 그의 덕이 울산에까지 파급되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향사 인물은 당해 고을과 관련이 있는 학문이 깊고 추앙 받을 수 있는 사림의 종사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그러나 울산에는 이런 기준에 적합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해 이웃 고을의 선현으로 정했던 것이다.
구강서원 사액은 정권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처음 1~2회의 청액은 서인집권기여서 실패하였다. 그런데 1689년(숙종 15)에 장희빈 소생(경종)의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이 있었다. 울산사림은 이 시기에 집중하여 사액운동을 벌려 성공했던 것이다.
1679년(숙종 5)에 울산 유학의 연원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위패를 봉안하고 1694년(숙종 20) 구강서원이라는 사액(왕의교지)를 받아 약 200여년동안 강학과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훼철된 후 舊터는 주거지로 변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든 향내 뜻있는 유림이 서원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현 복원 서원부지(반구동 산 171-1) 2640여㎡를 매입 울산광역시에 기부 채납하였다. 본 서원의 복원사업은 울산광역시에서 사업비 21억원을 중구청에 영달하여 서기2001년 3월에 착공하여 서기 2003년 2월에 준공되었다.

1)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 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대사성 이색(李穡)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해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사신의 임무를 다해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해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고려 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서원의 기능은 강학, 교화, 제사의 기능으로써 조선시대선비를 양성하던 곳으로서 복원규모는 사우인 숭도사(崇道祠) 7평, 내삼문3평, 구강서원의 편액이 걸린 강당인 지선당 25평, 서원의 입구로 유의문인 문루 선화루 13평, 고직사11평, 전사층 3평 5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