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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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사천서원(沙川書院)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봉암리 산50-2(24번지)
   남을진(諡 文安 南乙珍) , 조견(諡 平簡 松山 趙狷)
   1712년 (숙종 38)
   1784년 (정조 8년)
   2월 8일 중정(中丁)
   향토유적 제2호
 
 
사천서원(정절사)은 1712년(숙종 38)에 건립되었다.
조선조 정조 8년(1784)에 고려 충신 남을진(諡 文安 南乙珍) 공과 조견(諡 平簡 松山 趙狷) 공을 모신 사천서원에 왕이 친히 쓰신 정절사라는 사액을 내리시니 그 때에 이 대소인하마비가 세워졌다. 이 하마비는 이곳은 높은 사람의 묘와 사당이 있는 곳이니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말에서 내려가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1)남을진(南乙珍)
본관은 의령이고 호는 곡은(谷隱)이다.
지영광군사 증문하시중 천노(天老)의 차자(次子)로 개성 좌경동에서 고려 충혜왕 원년에 태어났다.
공민왕 17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여 고려 정헌대부 참지문하부사 겸 판전의감사로 있을때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곡은 남을진(谷隱 南乙珍)을 삼은(三隱)으로 교류하여 오다가 고려말에 정치가 혼란하자 관직을 물러나와 친척과 친우를 모아 주연을 베풀고 나라를 바로잡지 못하는 망국대부(亡國大夫)는 차라리 초야에서 농사나 지으리라 하고 시(詩) 한수를 지으니 난추지기행(難追之奇行)은 장종채미혼(將從采微魂)이라 하고 가족을 데리고 사천현 봉황동(지금에 양주시 은현면 하패리 낙낙동 봉디미에 은거(隱居)한지 6년후 이태조께서 특별한 예로 장조카 남재(南在)에게 어찰(御札)을 보내 출사하기를 바라며 수차 권하였으나 불응하자 이태조께서 남을진(南乙珍)의 절의(節義)를 빼앗기 어렵다 하고 이 사람에게 표창하리라 하고 사천백(沙川伯)을 봉하였으나 받지 않고 오히려 통곡하며 머리를 풀고 감악(紺岳山)으로 입산하여 1년을 은거하시다 1393년 64세로 순절(殉節)하시니 3일간이나 백운(白雲)이 굴을 외워쌓고 시신을 내모시니 굴중에서 태풍이 일어나 서책이 편편이 날려가니 아마도 신선으로 승천하시었다 하여 세인들이 이 굴은 남선굴(南仙窟)이라 전해온다.
순절한지 3백년 후 1712년 사림 이선제(李善濟) 외 3인이 서원건립 통문을 발송 원근 유림과 후손들이 합심하여 사천서원(沙川書院)을 건립하고 경기북부 유림과 후손들이 연이어 산소를 올리니 마침내 1784년 정조 8년 갑진(甲辰) 4월 13일에 친필로 정절사(旌節祠)로 사액(賜額)이 내리어 봉명예관으로 예조좌랑 이일운(李日運)이 파견되어 양주목사(楊州牧使) 청풍 김종수(金鍾秀)가 치제(致祭)하였고 매년 2월 중정일(中丁日)에 춘향제(春享祭) 8월 중정일(中丁日)에 추향제(秋享祭)를 봉행(奉行)하여 왔으나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패령에도 사천서원 정절사(沙川書院 旌節祠)는 사표가 된다하여 회철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원지(書院址)를 관의 권세에 밀려 빼앗기고 1893년(고종 30년) 계사(癸巳) 2월에 구지(舊址)로부터 남쪽으로 약 500미터 덜어진 곳에 야산 노천에 단(壇)을 설단(設壇)하고 128년이 되도록 단향제(壇享祭)로 지내왔다. 그러나 원근(遠近) 유림들은 충절에 정을 잊지못하여 매년 2월, 8월 단향제를 드리는 유림의 뜻이 갸륵하고 참으로 고맙기 이를 때 없으나 현장은 너무나 초라하였다.
후손인 남상옥(男相玉)의 제의로 1998(무인(1998(戊寅) 2월 25일 사우건립(祠宇建立)을 위한 정절사 중건 추진발기회 회장 이두영(李斗榮)이 맡고 동년 6월에 통문을 발송하고 동년 6월 24일에 추진위원회(李斗榮을 위원장)으로 구성 개최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축수하였다.
그리하여 양주시로부터 산림훼손 및 건축허가를 득하여 부지정리를 하고 사우(祠宇) 12.5평과 3문 4평 옆문 1.3평을 짓기로 문화제 업자와 계약을 체결하고 1998년 11월 9일에 착공하여 1999년 6월 4일 완공하고 9월 16일(기묘 8월 초 7일)에 위패를 유림 원로 최천용(崔天鏞), 정용학(鄭用學)이 봉안하고 유림과 후손들이 참석하여 봉안식을 하였다.
고려 절신으로 사문동 72 현중 한분이시고 감악산에 남선굴에 을진(乙珍) 석각상을 봉안하였고 사천서원(沙川書院) 정절사(旌節祠)를 1999년에 복원하였고 춘추로 2월 8월 중정일에 양주 유림제를 봉행하고 파주 고려대전 역사선양회관에 남씨로는 유일하게 남을진(南乙珍)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2) 송산 조견(趙損)1351(충정왕 3)~ 1425(세종 7).
1779년(정조 3) 8월 7일, 이른바 정조대왕의 남한산성 ‘기해주필’ 때 정조대왕이 수어사 서명응에게 이르기를, “열 집이 있는 고을에도 충신이 있는 법인데, 이 고을의 경우는 지경 안의 호구를 통틀어 셈하면 1만 호의 읍이라 하겠다.
지령(地靈)과 인걸(人傑)은 본래 고금의 다름이 없으니, 비록 근래라도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병자년 당시로 말하자면, 서흔남(徐欣男)은 사노(私奴)에 불과하였는데 청(淸) 나라 병사가 세 겹으로 에워쌌을 때 단신으로 빠져나가 삼남(三南)의 각도에 명을 전하였고,…… 국초(國初)에 이르러서도 김방경(金邦慶), 조견(趙?)의 부류들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광주(廣州) 한 부는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할 수 있을 만한데, 근래에도 특이한 행적과 기이한 재주로 향당(鄕黨)에서 이름난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 정조대왕은 경기도 광주를 ‘인재가 가득 찬 창고’라고 여겼는데 그 중에 대표적 인물 몇 명을 꼽으면서 송산 조견 선생을 언급한 것이다.
 
1) 정조가 꼽은 광주의 대표 인물
 
 
 
 
 
나라의 흥망성쇠가 교체하는시기에 오로지 한 뜻으로 절개를지킨 역사 인물 송산 조견(松山 趙?, 1351~1425) 선생의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경(巨卿), 처음 이름은 윤(胤)이었다. 고려가 망하니 자를 종견(從犬)으로, 이름은 견(?)으로 고치고 호를 송산이라 했다. 일찍이 스스로 희롱해 말하기를 “멸망한 나라의 사대부가 구차하게 세상에 살았으니 그 행실이 개와 같다고 하겠다.
또 개는 그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이 있으니 이름에 ‘견(?)’자를 따른 것은 그러한 지조가 있어서다”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선생의 아버지 조덕유(趙德裕)는 부친 조연(趙璉)의 벼슬을 이어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이 됐다.
성품이 맑고 깨끗해 강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영화와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고,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조견 선생의 맏형인 조인(趙璘)은 신돈(辛旽)이 나라를 맡았을 때,
사람들은 다투어 그에게 붙었으나 한 번도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인택(吳仁澤)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 모의하다가 일이 탄로나 귀양을 갔다가 곤장을 심하게 맞아 살해되고 말았다.
둘째 형은 바로 조선개국의 1등 공신인 조준(趙浚)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송산 조견 선생은 젊었을 때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 문과에 급제해 고려 말 안렴사(按廉使)가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상장군으로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됐다고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1410년 봉안사(奉安使)가 돼 태조 진영(眞影)을 완산부(完山府=전주)에 봉안했다. 1421년(세종 3) 3월 23일에는 궤장(?杖)을 하사받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으로 승격됐다.
1425년(세종 7) 5월 3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평성부원군 조견의 졸기>에도 그러한 이력과 함께 그가 별세하자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하사하고 관에서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했다.
시호를 평간(平簡)이라 하니,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이 평(平)이요, 화평하고 온순해 시비가 없는 것이 간(簡)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기록에서는 조견이 조선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온다. 이유원의 문집 <임하필기>에는 왕조를 혁명하는 즈음에 형에게 울며 간했으나 끝내 듣지 않자 달아나 송산에 이르러 이름을 견(?)으로 고쳐 견(犬)이라는 부수를 쓰고 호를 송산(松山)이라 했다. 대개 이름은 견마(犬馬)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뜻이고, 호는 산이 움직이지 않고 소나무가 시들지 않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조견은 효행으로 마을에 널리 알려졌으며 정몽주를 따라 교류했다. 정몽주가 그의 어짊을 알고 조정에 천거했고 공민왕 때의 관직은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다. 일찍이 형인 조준이 이성계를 옆에서 도와 추대하려는 뜻이 있음을 알았다. 이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형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왔으니 나라가 망하게 되면 죽을 따름입니다. 진실로 정달가(鄭達可=정몽주)와 더불어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달가(達可)는 곧, 포은 정몽주의 자다. 이 때 사람들은 조견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2) 끝내 뜻 굽히지 않은 고려 충신
조준은 동생이 화를 당할까 염려해 이방원과 모의해 조견을 영남안렴사로 연달아 내보냈다. 영남안렴사가 돼 외직으로 나갔을 때 태조가 즉위했는데 매번 그의 재주가 뛰어남을 칭찬해 호조전서(戶曹典書)로 삼고자 어찰(御札)을 써서 그를 불러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조견이 대답하기를 “산나물을 캐어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1939년 7월 27일 동아일보에는 조용훈이 쓴 <풍운아의 시혼>이라는 글에 조견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영남루에 올라서 지은 시 한편을 소개하고 있다.
삼 년 동안 두 번 영남루를 지나니 / 三年再過嶺南樓
은은한 매화 향기 나를 머물라 권하는구나 / 細細梅香勸少留
술 마시며 근심 씻고 노년을 보낼 만 하니 / 擧酒消憂堪送老
평생에 이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 平生此外求不須
조견 선생이 영남을 한 바퀴 순시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듣고 그 밤을 통곡으로 새운 다음 송도로 올라오지 않고 두류산에 들어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달을 안고 비가애장(悲歌哀章)을 읊으면서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에 두류산(頭流山=지리산)에 은거하다가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겨 은거했는데, 태조가 친히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조견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했으므로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망경봉(望京峯)’이라 했다. 또한 과천의 염주대(念主臺) 역시 조견이 고려의 임금을 생각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 정상은 석벽이 층으로 서 있어 경치가 절승(絶勝)이다.

3) 태조 만나서도 절을 안 해
태조가 청계산으로 조견을 만나러 오기에 앞서 형인 조준이 먼저
만나러 가니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됐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의 예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대는 과인을 도와 태평성세를 이루도록 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자 조견은 이를 거절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하고 이런 것을 모두 용납하고 돌아갈 때 말 채찍으로 땅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몇 리까지를 조견의 땅으로 삼아 그의 정절을 표창하고자 한다”라고 하면서 청계 1면(面)을 봉한 후 돌집을 지어 정절을 표했더니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끝내 이를 받지 않고 양주(현재는 의정부시 민락동) 송산으로 옮겨가 살며 스스로 ‘송산거사’라고 했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을 잊지 않는다는 뜻과 소나무의 늦게 시드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세종 때 조견이 죽자 백관들에게 검은 띠를 3일 동안 차도록 명했고, 이어서 고향인 청계산 망경대 근처의 언덕에 장사지내도록 했다. 조준은 아우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 해 몰래 개국훈(開國勳)에 기록해 억지로 평성부원군에 봉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했다.
조견은 일찍이 철석(鐵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해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고 했는데, 자손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한결같이 훈적(勳籍)대로 썼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석의 벼슬을 쓴 부분에 내리쳐 비석은 깨어지고 ‘공지묘(公之墓)’ 세 글자만 남았으니 사람들도 지금까지 그것을 일러 기이한 일이라고 했다.
1784년(정조 8)에 경기 유생 정동우(鄭東羽) 등이 상소하기를, “조견은 바로 개국 원훈인 조준의 동생으로, 정몽주와는 친하게 지냈으며 명예와 절개를 스스로 가다듬었습니다”고 하면서 사당의 현판을 내려줄 것을 청하므로 이를 허락했다.
1790년(정조 14)에는 경기 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상소해 조견의 충절과 도학은 실로 정몽주와 서로 대등하다고 하면서 특별히 명해 조견을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낼 수 있도록 청했다. 조견은 양주의 정절사(旌節祠), 송산사(松山祠)에 배향됐다.
송산사(松山祠)는 현재 의정부시 민락동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42호로 지정돼 있고, 조견 선생의 묘는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 30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성남문화원 학술토론회 및 문화재 지정 청원에 따라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2001년 2월 20일)돼 보호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불천위 사당은 공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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