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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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병서원(玉屛書院)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6
   박 순(朴 淳) 이의건(李義健) 김수항(金壽恒) 김성대(金聲大) 윤봉양(尹鳳陽) 이화보(李和甫)
   1649년(인조 27)
   1713년(숙종 39)
   음력 3월 중정일
   포천시향토유적 제26호(1986.04.09지정)
옥병서원은 선조 대 영의정을 지낸 뒤 포천에서 말년을 보낸 사암 박순(思庵 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본래 서원 터는 박순 사위의 집이 있던 자리로, 벼슬을 그만두고 포천에 머물 뜻이 있던 박순에게 내어드린 것이라 한다. 박순은 이곳에 새로 집을 짓고 배견와(拜鵑窩)라 이름 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649년(인조 27)에 지역유림들이 배견와 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신완(申玩)이 상소하여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고, 1713년(숙종 39)에 옥병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옥병’이란 이름은 이곳 지명인 창옥병(蒼玉屛)에서 따왔으며, 창옥병은 영평팔경(永平八景)의 하나로 영평천 물가에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을 가리킨다.
그 후 옥병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매안하였다. 이때 배향인물의 영정은 이덕수(李德秀)가 보관해오다가 1892년 유림들이 서원 터에 영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계속하는 한편 김성대(金聲大)와 이화보(李和甫)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어 1926년에는 윤봉양(尹鳳陽)을 추향하였다. 이후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영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978년에 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고 1980년에 사당과 삼문을 복원하였고, 이듬해에는 배향인물의 위패를 다시 봉안하였다. 1983년에 담장을 보수하고 1987년에 동재·서재·홍살문 등을 복원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3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우(祐)이며, 어머니는 당악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 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이의건(李義健, 1533∼1621)
조선 중·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수한(守漢)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직장이 되었으나 친상으로 곧 사직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을 떨쳤고,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동은유고≫가 있다. 그의 글씨는 광평대군 여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3)김수항(金壽恒, 1629∼168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극효(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헌(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래(金琜)의 딸이다.
1645년(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하고, 1646년 진사시와 1651년(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典籍)이 되었다. 이어 병조좌랑·사서(司書)·경기도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165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 정시 문과에 5등으로 급제해 효종으로부터 말을 받았으며, 이듬 해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어 중학(中學)·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1655년 호당(湖堂)에 사가독서하고 수찬이 되었다가, 응교(應敎)·사간·보덕(輔德)을 지냈으며,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 형조참의·승지·부제학을 지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릉비의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도승지·예조참판·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662년 왕의 특명으로 예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특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명사들을 조정에 선임하는 데 힘썼다. 1672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에 승진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그러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이 왕의 경원을 받고 물러남을 보고 남인 재상 허적(許積)을 탄핵한 대간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판중추부사로 물러났으며,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수흥(壽興)이 쫓겨나자, 대신 좌의정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숙종 즉위 후 허적·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 정(福昌君 楨)·복선군 남(福善君 柟)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고 1678년(숙종 4)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복귀, 영의정이 되어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였다.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임되었다.
1689년 태조어용(太祖御容 : 태조의 영정)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掌令) 김방걸(金邦杰) 등이 탄핵해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뒤이어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한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 인의 공격과 사헌부·사간원의 합계(合啓 : 함께 계문을 올림)로 사사되었다. 이는 경신 이후의 남인 옥사를 다스릴 때 위관으로 있었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재상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했기 때문에 입게 된 것이었다.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 : 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尹拯)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 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그가 속한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 측에서는 그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김성대(金聲大, 1622~1695)
성대는 자는 이원(而遠), 호는 율강․촌로(村老), 본관은 안산이다. 72세의 나이인 숙종 19년(1693년)에 쌓은 공부를 시험코저 사마시라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였다. 이때 숙종이 늙은이가 과거에 응시하러 온 것을 보고 “저기 저 늙은이가 누구인고?” “예, 전하! 경기도 영평에서 온 늙은이 옵니다.” “나이가 칠십은 족히 된 것 같은데 무엇을 하려고 이제야 과거에 응시하였단 말인가?” “예, 전하! 평생 학문을 하였으나, 자신이 어느 경지인지 몰라 자신을 시험하러 왔다 하옵니다.” 숙종께서는 늙은이의 마음을 아시고 친히 호를 ‘촌로’라 지어 내렸다. 그리고 벼슬을 내리시어 ‘제릉 참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성대는 “황공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며 감사를 표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1695년에 생을 마쳤다. 성대의 효성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듣고 크게 기뻐하던 숙종은 성대의 죽음을 슬퍼하며 호조 참판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 장례를 관장하였다.
이후 호조 참판에서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되었는데 포천과 영평등 인근의 유림과 벼슬아치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뜻을 기리고저 포천군 창수면의 옥병 서원에 여러 선비들과 함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5)윤봉양(尹鳳陽, 1695~1762)
포천군 출신의 학자로 자는 서명(瑞鳴), 호는 존성재(存省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의 문인으로 학덕이 뛰어난 거유(巨儒)로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1926년 포천 유림들의 공의로 옥병영당(玉屛影堂-당시에는 서원이 훼철되어 영당을 세웠다)에 추가 배향하였다.
 
6)이화보(李和甫, 1714~1781)
학자 초명은 제보(濟甫) 순보(醇甫). 자는 대순(大醇). 소자(小字)는 여시(如施), 대화(大和), 호는 유심재(有心齋)이다. 본관은 전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 도암 이재(陶菴 李縡)의 문인이다.
유심재는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말과 행동거지가 곧고 바르며 매사를 확실하게 처리하였다. 도암 선생의 제자 중 뛰어난 후학들을 천문고제(泉門高弟), 오학정맥(吾學正脈)이라 하여 도암 문하의 높은 제자는 우리 학문의 정맥을 이루었다 하고 칭송하였다. 학문에 전심하여 유명한 학자로 칭송 받았으며 특히 실학(實學)에 전심하였다. 학행으로 여러번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71년(고종8) 옥병서원이 훼철되고 1892년(고종29) 유림들의 공의로 서원터에 영당(影堂)을 세워 박순(朴淳), 이의건(李義健), 김수항(金壽恒) 선생의 영정을 봉안할 때 유심재, 촌로(村老) 선생을 추가 배향하고 그 후 1926년 윤봉양(尹鳳陽)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서원은 산을 등지고 영평천이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를 띠고 있다. 건물의 좌향은 동향(東向)을 취하고 있으며, 시설물로는 사당인 숭현각(崇賢閣)을 비롯하여 동서재·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강당은 복원되지 못한 채 주춧돌만 남아있다. 동·서재는 각각 창옥재(蒼玉齋), 송월당(松月堂)이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최근 복원하면서 서예가 김충현이 쓴 것이다. 송월당은 선조가 박순을 논하면서 “송균 같은 절조에 수월 같은 정신으로 충용(忠勇)한 도량에 온아(溫雅)함을 보탠 성품”이라고 한 데서 따왔으며, 창옥재는 이곳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한판 홍살문 옆으로 박순의 신도비가 2기 있는데, 각각 1909년과 1991년에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