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봉서원(五峰書院)(집성사)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dataType=02 [1507]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58-6
   공 자(孔 子) 주 자(朱 子) 송시열(宋時烈)
   1561년(명종 16)
   
   음력 9월 초정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5호(1973.07.31지정)
조선 1556년(명종 11) 강릉부사 함헌(咸軒)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오도자가 그린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와 1561년(명종 16)에 처음 세웠다. 그 후 1782년(정조 6)에는 주자, 1806년(순조 6)에는 송시열을 함께 모시면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서원은 없어지고 영정과 위패는 강릉향교로 옮겨졌다. 지금의 서원은 1903년에 새로 지어졌는데 강릉지방의 유림이 사당건물을 지어 집성사라 하고, 사당 옆에는 별묘를 세워 칠봉사라 하였다. 집성사, 칠봉사, 문, 오봉강당, 묘정비각, 2개의 묘정비 등이 남아 있다.
집성사에는 공자·주자·송시열 3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칠봉사에는 함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강당은 마루방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각종 행사를 치르기도 하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나 학문을 토론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공자(孔子, BC 551~BC 479)
 
노나라 곡부에서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왕조(周王朝) 건설에 공이 컸던 주공(周公)이 세운 나라이다. 조상은 전왕조(前王朝)인 은(殷)의 자손이 봉(封)함을 받은 송(宋)나라의 공족(公族)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시골의 무사였다.
≪史記≫의 ‘孔子世家’에는 공자의 키가 9尺6寸(약188cm)으로 ‘長人’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마을의 늙은 선생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릴 때부터 제사(祭祀)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로부터의 종교의례·제도·관습에 밝았다고 한다. 공자 자신도 15세때 ‘학(學)’에 뜻을 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윽고 17세 때부터 말단 관리가 되어 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과 ≪서경≫ 등을 배웠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맡아보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의 저자인 주공을 청년 시절부터 사모하였고, 평생 동안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공자의 인망은 갑자기 높아져서 기원전 499년에는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외교관도 겸하게 되었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계씨를 타도하려고 여러 가지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막 성사되려는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해 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10년이나 걸린 이 방랑 생활은 공자에겐 가장 괴로운 기간이었다. 만년의 공자에게는 여러 가지 불행이 겹쳤다. 아들인 백어(白魚, 혹은 리鯉라고도 한다)가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었다. 공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공자는 중국에서 옛 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서들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안회, 자하, 자로 등이 유명하다. 또 원래 노나라에 있던 연대기를 ≪춘추≫라는 책으로 다시 편찬했다고 한다.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은 유교로서 오랜 세월 중국에 전해 내려와 천 수백 년에 걸쳐 중국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2)주자(朱子, 1130-1200)
주자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희(朱熹)의 존칭이다. 성(姓)은 주(朱), 휘(諱)는 희(熹)이며, 자(字)는 원회(元晦)·중회(仲晦)이다. 그리고, 호(號)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이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정호·정이 등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 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 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서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 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 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극동 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3)송시열(宋時烈,1607∼1689)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민정중(閔鼎重)이 찬(撰)한 「오봉서원급칠봉사병원기(五峰書院及七峰祠倂院記)」에 보면, “聖廟三間 前廊幷神門五間 左右齋廊六間 講堂風詠樓十間 書冊庫一間 七峰祠一間 大門一間(성묘삼간 전랑병신문오간 좌우재랑육간 강당풍영루십간 서책고일간 칠봉사일간 대문일간)”이라 하여 건립 후 숙종조까지의 서원 규모를 살필 수 있다. 현재는 맞배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성사, 맞배지붕인 칠봉사, 그리고 정문이 있고, 집성사 담장 넘어 좌측으로 팔작기와지붕 정면 4칸, 측면 2칸의 오봉강당이 있다.
1)오봉서원기적비 (1806년에 건립)
오봉서원(五峯書院)의 건립내력과 연혁을 기록한 기적비(紀蹟碑). 오봉서원에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한 후 그 건립시기 이후부터의 내력을 적어 기적비를 세웠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12㎝, 비신 높이 161㎝, 비신 너비 67㎝, 두께 14㎝이다. 비신은 오석이고 비좌와 비두는 화강석이다. 비두는 옥개석 모양이다. 1806년(순조 6) 보국판중추부사(輔國判中樞府事) 이만수(李晩秀)가 찬(撰)하였고, 대사헌(大司憲) 조윤대(曺允大)가 서(書)하였다. 비 전면에 ‘오봉서원기적비(五峯書院紀蹟碑)’란 비제가 새겨져 있고, 비 뒷면과 좌우에 비문이 적혀 있다.
 
2) 오봉서원 고적
1929년 기사년 12월 장현에 사는 최동길(崔東吉)오봉서원 고적 책자의 서언(序言)을 쓰면서 옛 고적을 잊지 않기 위해 책자를 낸다고 하였다. 오봉서원은 1556년 이천부사로 있던 함헌(咸軒)[1508~?]이 병으로 물러나 고향에서 머무를 때 최수장, 최운우 등이 강릉 구산에 서원을 지을 것을 청하자 최덕령 진사 권대균 등의 동의를 얻고 감사 윤인서와 강릉부사 홍춘년의 도움으로 짓게 되었다.
오봉서원에는 공자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진영은 함헌나라 서장관으로 갔을 때 오도자(吳道子)의 수화(繡花)인 공자 진영을 가져온 것이다. 당시의 건물은 성묘 3칸, 전랑과 신문이 5칸, 좌우제랑이 6칸 강당이 10칸, 서책고가 2칸 대문이 2칸이었다. 오봉서원은 사액서원은 아니나 공자의 진영을 봉안한 강원도 유일의 서원이므로 1618년에 위전(位田) 3결(結)과 소속인 20명을 하사받았다. 1782년에는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1831년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서원십영(書院十詠)』에도 오봉서원이 들어 있는데, 서원을 설립하는 데 최운우가 나섰고 퇴계 이황의 지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68년(고종5) 전국의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철폐령으로 오봉서원도 철폐되어 공자의 영정은 강릉향교로 옮겨졌다. 1914년 집성사를 중건하고 1916년 묘정비를 세웠으며 1928년 칠봉사를 중건하고 강당도 세웠다. 1973년 7월 31일 강원도유형문화재 45호로 지정되었다.
 
3)묘정비(1856년에 건립)
오봉서원 건립 배경과 내력 그리고 제향인물 등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 공자 진영의 봉안 인물과 과정 그리고 서원의 건립과정, 주자와 송시열의 제향 등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우암 송시열을 추배한 사실을 추가로 기술하여 1856년(철종 7) 강릉 지역 유림들 뜻을 모아 새로 세웠다. 비각은 없고 비석만 세워져 있다. 묘정비는 방형 비좌, 비신, 옥개석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석의 총 높이는 213㎝, 비신 높이 163㎝, 비신 두께 20㎝, 비신너비 77㎝이다. 비 사면으로 보호철책이 세워져 있다.
비제는 ‘오봉서원묘정비(五峰書院廟庭碑)’이고, 비문은 대광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이 찬(撰)하였고, 가선대부강원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원주목사(嘉善大夫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原州牧使) 이종우(李鍾愚)가 썼다.
1806년(순조 6년) 이만수가 찬하고 조윤대가 쓴 기적비와 1856년(철종 7) 조두순이 찬하고 이종우가 쓴 묘정비가 있다. 그리고 구묘정비(舊廟庭碑)가 서원 앞뜰에 세워져 있다. 강당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은 원규(院規), 퇴계(退溪) 이황(李滉)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지은 서원도시(書院圖詩) 현판 그리고 ‘오봉강당(五峯講堂)’이란 현액이 걸려 있다.

人才淵藪古臨瀛(인재연수고임영) 인재들이 옛 임영의 땅에 모여
闢學丘山澗石淸(벽학구산간석청) 구산의 냇가 맑은 돌 구비에 배움의 터를 열었네
看圖知院稱嘉名(간도지원칭가명) 서원에 걸린 그림을 보니 아름다운 이름을 알겠네
病謝鋪張愧不情(병사포장괴부정) 병을 핑계로 학문을 펴지 못한 내처지 부끄럽네
降聖千年名己近(강성천년명이근) 성인이 나신 지 천년 명성이 이미 예 가깝도다
乞靈今日敎將明(걸영금일교장명) 오늘 이 서원의 힘을 입어 가르침이 밝아지리니
寄語諸君須堅坐(기어제군수견좌) 그대들의 굳건한 배움의 자리에 한 마디 부치니
從來出入害功程(종래출입해공정) 오가는 길에 방해나 되지 아니할지.
- 퇴계(退溪) -

曾聞祠廟在臨瀛(증문사묘재임영) 일찍이 임영의 땅에 사묘가 있음을 들었노라
遺像今朝拜肅淸(유상금조배숙청) 성인의 모습을 남겨 오늘 깨끗한 세상 기리네
鳶魚臺上偶題名(연어대상우제명) 연어대 위 제명을 맞추어 걸어두고
風詠樓前暢遠情(풍영루전창원정) 누각의 앞에서 시를 읊으며 깊은 정감을 펴노니
脚踏關東一頭地(각답관동일두지) 관동의 한 지역을 두루 누벼
塵眸刮得十分明(진모괄득십분명) 눈 가린 티끌을 비벼내 훤히 밝도다
退老詩篇垂史蹟(퇴노시편수사적) 퇴계 선생 시는 역사의 공적을 세우시고
栗翁模範示工程(율옹모범시공정) 율곡 선생은 나아갈 길의 모범을 보이네.
- 명재(明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