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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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산서원(龍山書院)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201-1
   이세필(李世弼)
   1705년(숙종 31)
   
   3월3일. 9월9일
   용산서원학규현판-강원도유형문화재 제78호(1982.11.03지정) 용산서원전적류(일괄)-강원도문화재자료 제140호(2007.1.19지정)
용산서원은 1705년(숙종 31)봄에 삼척부사 이세필이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참봉 최세량(崔世亮)을 훈장으로 임명하고 자기 녹봉을 희사하여 그것을 자금으로 생도 수십 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지방의 유지들도 이부사의 뜻에 따라서 계(契)를 모아(처음에는 8명, 후에 28명이 됨) 학당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세필은 손수 용산학당이라는 현판(懸板)을 써서 걸고, 학규 21계를 써서 학사벽상에 걸어 생도들이 조석으로 학규를 읽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이세필은 여가를 할애하여 수시로 학사에 와서 생도들을 직접 교육하였다.
1705년(숙종 31) 9월에 이세필이 사헌부 집의로 영전되자, 동년 10월 이세필의 문인 및 사림 등이 중심이 되어 용산서원 북쪽 한 모퉁이에 생사당(生祠堂) 1간을 건립하여 진상(眞像)을 봉안하고 조석으로 행례(行禮)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학당으로 시작한 용산서당은 1719년(숙종 45) 8월에는 사당 3간을 증축하고 8월 16일 좌랑 윤정(尹淀)이 이세필의 위패(位牌)를 쓰고 좌상 조태억이 봉안문을 찬술하여 봉축(奉祝)하고 용산서원을 용산서당이라 하였다.
1724년(경종 4) 이세필의 영정은 촛불에 타 없어졌다. 1789년(영조 13) 강원도 도백(道伯)으로 왔던 선생의 계남 이형좌와 선생의 외손인 경상도 도백 박문수의 힘으로 사우 6간, 명륜당, 동․서재 등을 다시 지어 서원의 면모가 새롭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68년 철폐되어 토지와 재산은 삼척향교에 이관되었으며, 흥학비(興學碑)만 남게 되어 오랜 세월 그 유적지를 지키고 있었다.
1953년 향교 보조금 1만 6천원으로 흥학비를 현 위치에 옮기고 1956년 황순황 등 사림 이 모여 계를 조직하여 사우를 다시 짓고 3월 삼짇날과 9월에 구천 이세필선생의 다례를 거행하였다. 1966년부터는 율곡선생을 주(主)로 하고 우암 송시열을 동편에, 구천 이세필을 서편에 모셔 다례를 올리다가 1976년부터는 3월 삼짇날 연 1회만 제향하기로 했다. 1984년에는 이세필만 봉안하고 이이와 송시열을 廢位하였다.

1)주벽-이세필(李世弼, 1642∼171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 (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는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퇴계집≫을 탐독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 개의하지 않고 날마다 ≪대학≫·≪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 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 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
건축물소개
경내의 건물로는 용산사(龍山司)등 3칸의 사우(祠宇), 각 4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고사(雇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세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림의 회합과 학문 강론 및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서원의 관리인이 기거하는 곳이다.


1)흥학비
 
2)용산서원학규현판-강원도유형문화재 제78호(1982.11.03지정)
숙종 31년(1705)에 작성된 학규현판은 피나무판으로 가로 156cm, 세로 48cm의 크기이며,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삼척의 흥학을 위하여 용산서원을 창건하고 학규 21조를 제정하여 이것을 수서(手書)하여 판각한 것으로 오늘의 교칙에 해당되는 것이다. 횡액(橫額)에 “龍山書堂學規 21條”를 해자종서(楷字縱書)로 음각하고 후기에 “崇禎後第二乙西 六月 月城 李世弼 爲龍山書堂學徒謹書”라고 하였다. 이 용산서당학규 현판은 280여년전인 1705년에 제작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며, 학규 21조의 내용은 강원지방의 서당 및 서원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3)용산서원전적류(일괄)-강원도문화재자료 제140호(2007.1.19지정)
동해 용산서원 소장 전적류는 동해서원의 운영에 대해 규정한 전적들로, 18세기 삼척지방에서의 생활사와 교육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높다.
 
수 량 : 일괄(一括) 8점(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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