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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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고로서원(古老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
   정 분(鄭 苯) 정지산(鄭之産)
   1808년(순조 8)
   
   
   
고로서원은 충효사(忠孝祠)라고도 불리며 단종 조에 우의정을 지낸 애일당 정분(愛日堂 鄭苯)과 포옹 정지산(逋翁 鄭之産)을 배향한 사우이다. 정분은 1453년 계유정난 당시 황보인, 김종서 등은 주살되고, 자신은 고신을 추탈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으며 1년 뒤인 1454년에 사사되었다. 그 후 290여년후인 1746년(영조 22)에 이르러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는데, 충효사는 정분의 신원과 복권을 마치게 되자 1808년(순조 8)에 후손들이 공주군 사곡면 호계 고로리에 건립한 것이다. 1808년 사우가 창건된 이후 1924년에 재각(齋閣)인 경모재(敬慕齋)를 축성하였고, 1931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때의 사우 중수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부여 외산에서 정분의 영정을 발견하게 되어 이를 모사하여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한편 후손들은 1982년 정분의 충과 정지산의 효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충효사라고 명명하였으며 1994년에 공주유림과 후손들이 삼문을 세워 고로서원이라 명하고, 정분과 정지산을 모시게 되었다.

1)주벽-정분(鄭苯, ?∼145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유(子甹),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신중(臣重)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오(以吾)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년(세종 4) 사간원우헌납이 되었고, 이어 좌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에 올랐다. 1428년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수재 상황을 살폈다. 1429년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듬해 결송사(決訟事)로 수금되어 원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버지의 소청으로 양주에 이치(移置)되었다.
1432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대언·우승지·좌승지가 되었으나, 곧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6년 충청도감사가 되었고, 1438년 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9년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대했고, 세종이 옮겨 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을 짓는 일을 감독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우찬성에 오르면서 계속 판이조사를 겸임했고,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沿邊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단종 즉위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2)정지산(鄭之産, 1423∼146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평(彦平), 호는 포옹(逋翁). 아버지는 목사 효안(孝安)이며, 어머니는 소감(少監) 유찬(柳瓚)의 딸이다. 종숙인 우의정 분(苯)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깊어 이름을 떨치더니 1445년(세종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50년에 호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현감으로 나갔다가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그의 양아버지인 분을 죽이자 벼슬을 버리고 공주 동혈(洞穴)에 들어갔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몇 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양어머니 정씨(河東鄭氏)를 그곳에 모셔 지성으로 봉양하니 사람들이 그 집을 가리켜 충효의 가문이라 하였다. 단종이 비명에 죽자 항상 영월 쪽을 향하여 앉아서 옛 임금을 사모하였다.
1459년(세조 5)에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단종과 단종을 위하다가 죽은 충신들의 넋을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초혼하여 제향 하였다. 산채와 어류를 캐고 잡아 숙모전의 제향을 받들면서 <채미가 採薇歌>와 <자규사 子規詞>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뒷날 정조 때 판서에 증직되고, 충신·효자의 정려가 내려졌다. 장릉(莊陵) 충신단과 동학사 숙모전 서무(西廡)에 배향되었다.

한편 후손들은 1982년 정분(鄭苯)의 충과 정지산(鄭之産)의 효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충효사라고 명명하였으며, 1994년에 공주유림과 후손들이 사우와 삼문을 세워 고로서원이라 명하고 정분과 정지산을 모시게 되었다. 사우는 경모재(敬慕齋)라는 진주정씨 재실 뒤편에 위치하는데, 삼문과 사당이 각각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은 의재문(義在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당의 전면에는 충효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의 왼쪽에는 정분의 영정이 있고 중앙에 정분과 정지산의 신위가 있다. 건물은 1808년(순조 8)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둘레의 담이 30칸으로 되어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정분(鄭苯)과 정지산(鄭之産)을 배향하는 사우에 해당한다.
[위치]
공주시에서 예산 방향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가다 사곡면소재지를 지나 마곡사 방면으로 가다 보면 호계리에 이른다. 마을 입구에 충효사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도로 왼쪽으로 약 300m 정도 가면 있다.
[변천]
1924년에 제각(祭閣)인 경모재(敬慕齋)를 축성하였고, 1931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때 우연히 부여의 외산(外山)에서 정분의 영정을 발견하자 이를 모사하여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1982년 정분의 충과 정지산의 효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후손들이 충효사라고 명명하였으며, 1994년에 공주 유림과 후손들이 사우와 삼문을 세워 고로서원(古老書院)이라 명하고 정분을 주향으로, 정지산을 종향으로 모시게 되었다.
[형태]
충효사는 삼문과 사당이 각각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에는 ‘의재문(義在門)’, 사당에는 ‘충효사(忠孝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 왼쪽에는 정분의 영정이 있고, 중앙에 정분과 정지산의 신위가 있다. 건물은 1808년(순조 8)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둘레의 담은 30칸이다.
[현황]
충효사는 현재 사곡면의 진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고로사(古老寺)라는 절을 고쳐 재실로 이용하고 있다.

충효사(고노서원)와 관련된 자료로는 1804년과 1905년에 각각 명정을 받고 1982년에 공주시에서 지은 정분, 정지산의 정려와 1957년에 세운 정분신도비가 있다. 그 외의 자료로 사우의 연혁을 파악할 수 있는 「포옹선생실기(逋翁先生實記)」(1910)와 「경모재지(敬慕齋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