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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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충곡서원(忠谷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 115-2번지
   계 백(階 伯)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 개(李 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이현동(李賢童) 박 증(朴 增) 김정망(金廷望) 김익겸(金益兼) 김만중(金萬重) 김홍익(金弘翼) 김자빈(金自鑌) 이민진(李敏進) 박 종(朴 種) 조병시(趙秉始) 이학순(李學純)
   1692년(숙종 18)
   
   3월, 9월 중정(中丁)
   충청남도기념물 제12호(1976.10.04지정)
1692년(숙종 18) 논산시 부적면 수락산 서쪽 산록(山麓)에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계백(階伯),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익겸(金益兼) 등 8인을 제향하였으나 후에 10인을 추배하여 지금은 18인이 봉안되어 있다. 충곡서원은 8명의 선현을 제향한다고 하여 팔현서원(八賢書院)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육신서원(六臣書院)이라 불린 기록도 있다. 숙종 대의 노론 중진 송상기(宋相琦) 문집에 보면 연산 육신서원의 상량문(上梁文)이 실려 있어서 옛 별칭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아마도 사육신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계백과 김익겸까지 8명이 제향된 상태에서 육신서원이라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기록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처음에는 사육신만 제향되었고 나중에 2인이 추향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본 서원의 가장 큰 특징은 무인(武人)인 계백이 주벽(主壁)에 제향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향인물들의 공통점은 거의 충절인(忠節人)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박팽년 등 사육신과 계백 모두 충절인이며 김익겸도 병자호란 때 강화읍성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그런데 본 서원은 후대로 내려오며 배향인들이 크게 증가하여 지금은 모두 18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의 8인 이외에 10인이 더 추배된 것인데 김정망(金廷望), 김홍익(金弘翼), 박정(朴種), 이민진(李敏進), 조병시(趙秉始), 김만중(金萬重), 김자빈(金自鑌), 이현동(李賢童), 이학순(李學純), 박증(朴增) 등이 그들이다. 충곡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5년에 이르러 사우만 중수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다시 피폐해지자 1977년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주벽-계백(階伯, ?~660) 백제 말기의 명장이다. 서기 660년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당 연합군 백제를 침공할 때 백제와 당과는 금강 하류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와는 황산벌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이 때 계백은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거점을 두어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대와 싸워 초기에는 모두 승리하였으나 신라에서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 등장하면서 형세는 역전되었다. 계백의 황산벌 출전은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싸우다 죽겠다는 결사의 계책이었다. 그는 “두 나라의 대군을 맞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가 적에게 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칼을 뽑아 처자식을 죽이고 최후의 결전에 나섰던 것이다. 결국 신라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전사하였다. 계백은 지(智)·인(仁)·용(勇)을 겸비한 장수로서 품계는 달솔로 좌평 다음가는 2품 벼슬이다. 그의 묘소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 4번지에 있다. 2)박팽년(朴彭年, 1417~1456) 박팽년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며, 본관은 순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뒤 그를 형조참판으로 임명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김질의 변절로 탄로나 처형되었다. 숙종 때 누명을 벗고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3)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박팽년·최항·이개·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의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삼고·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성삼문이 죽음을 당한 후 집을 몰수하여 뒤졌을 때 1455년 이후 나라에서 준 쌀은 하나도 먹지 않고 녹(祿)이라고 써서 붙인 채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논산 지방에는 본 서원 외에 금곡서원에 제향처가 있고 가야곡면에 성삼문 사당이 따로 세워졌으며 또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는 성삼문의 일지체(一肢體)가 묻혀있는 묘소가 있다. 4)이개(李塏, ?~1456)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1436년(세종 18)에 등재, 1447년(세종29)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들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문(時文)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피살되었다. 당시 이개가 읊은 시는 충절을 잘 드러낸 명시로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평소 숙부인 이계전(李季甸)이 세조에게 내왕함을 항상 경계하였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1758년(영조 38)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5)유성원(柳誠源, ?~1456) 유성원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1444년(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에 합격, 집현전에 뽑혀 이름을 떨쳤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교서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고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변절로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결했다. 숙종 때 시호를 절의(節義)라 내렸고, 영조 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다. 6)하위지(河緯地, 1387~1456) 하위지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라 하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45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經筵)에 왕을 모시며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의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으로 뻗은 능선의 사면(斜面)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형상 서향으로 되어있다. 건물 구조로는 홍살문을 입구로 하여 외삼문, 동·서 양재, 내삼문, 사우의 순으로 서향하고 있다. 1)동재 지형상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기단(基壇)을 구축하고 그 위에 4각형의 주초석을 놓은 뒤 사각주(四角柱)를 세우고 도리식의 맞배지붕으로 가구(架構)하였다. 2)서재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도리식의 맞배지붕인데 가구 양식은 동재와 같다. 3)사우 사우는 전면의 대지(臺地)보다 한 단 높게 조성된 대지위에 건립하였는 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도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어간의 창방 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