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악서원(東岳書院)
   충청남도 당진군 송상면 명산리 선머리(서원머리)
   이안눌(李安訥)
   1706년(숙종 32)
   
   
   
‘동악서원’의 창건 때의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각종 문헌마다 다른 이름이 보이는데

1)주벽-이안눌(李安訥, 1571∼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좌의정 행(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원정(元禎)이고, 아버지는 진사 형(泂)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대호군(大護軍) 양의 딸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이안눌은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았다. 그래서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다. 이들의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하였다. 이안눌은 29세 때에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었다. 1601년(선조 3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다.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이안눌은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되었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었다.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이안눌은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에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로 뽑혔다. 그래서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1636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별세하였다. 이안눌은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시를 지을 때에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 聞歌>가 특히 절창이라 일컬어 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이다.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안눌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 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다.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이안눌은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서원지는 2단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동향이다. 상단에는 석축의 기단이 있었던 듯하나, 현재 복토되어 확인되지 않으며 약 50여 평의 넓이이다. 하단부는 현재 밭으로 개간되어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1)이안눌 묘소 및 신도비 신도비는 이안눌과 그의 후손들의 묘소가 있는 당진군 정미면 사관리 선산 앞 길가에 세워져 있다. 1712년에 건립한 것으로 원래 신도비문은 그 이전에 마련되었던 것(김상헌 撰, 송준길 書, 김수항 篆)이고, 이때에 비를 건립하면서 간략한 추기(追記)를 이집이 찬하였다. 옥개형 이수를 올린 화강암 석재 비시의 규모는 높이 238.5cm, 폭 98.5cm, 두께 38.3cm이다. 이안눌 시단 동악 이안눌선생 유래 이안눌(李安訥) 선조 4년 (1571)~인조 15년 (1637), 자는 자민(子敏), 호는 東岳), 시호는 문혜 (文惠), 본관은 덕수(德水), 증조는 이기(李芑), 조부는 이원우(李元佑), 생부는 이형(李 泂), 재종 숙부 사헌부 감찰 이필(李泌)에게 입양되었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 였다. 동년배인 권필과 선배인 윤근수, 이호민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동악시단(東 岳詩壇)이라고 하였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주목사. 동래부사. 담양부사. 경주부윤.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 동부승지. 좌부승지. 강화부사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 강도유수. 함경도관찰사. 예조판 서 겸 예관문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차라에 제수되었다.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고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 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 다. 담양의 구산서원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동악집 26>권이 있다. 아래는 동악 이안눌 선생의 가연 이다. 어느 해 대보름날 밤 다리밟기에 나섰던 새 신랑이 초례를 치른지 며칠 안돼서 엉뚱한 새색시와 뜻하지 않게 기연을 맺게된 야담이 있다. 며칠 전 장가들은 소년 이안눌(李案訥)은 새신랑으로서 새옷을 입고 대보름날 밤에 수표교를 밟 은 뒤 술이 곤드레가 되어 길가에 정신을 잃고 스러졌다. 때마침 오늘 초례를 치른 신부집에서의 새신랑도 다리 밟기에 나갔다가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하인들을 시켜 신랑을 찾 아 돌아 다녔는데 소년 이안눌이 길 옆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새신랑이라고 생각한 하인들은 고 이 업어다가 신방에 눕혔다. 며칠 전 장가든 이안눌은 혼미한채 엉뚱한 새신부와 그날 밤 한 이부 자리에서 잤다. 아침이 되자 잠에서 깨어난 이안눌은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이때 신부는 “저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譯官)을 지내온 중인(中人) 집안이온데 무남독녀라서 차마 죽을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더럽 혀진 몸이나마 장차 섬길수만 있게하여 주신다면소실이 되어 늙은 부모를 봉양하다가 명대로 살았 으면 하온데...” 하면서 애처롭게 하소연하였다. 이안눌은 “집안의 범절이 엄한 데다가 미처 과거에 급제하지 못 한 초립동인 몸으로 어찌 축첩할 수 있겠소.” 하자, 신부는 “이모님이나 고모님이 계시면 거기에 저를 의탁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원했다. 이안눌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양가에는 물론 비밀로 했으며 또 과거에 급제 하기 전에는 서로만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 뒤 이안눌이 급제하자 신부를 집안으로 들이고 신부의 노부에게 그때의 일들을 자세하게 이야 기하였다. 신부의 노부는 기가 막혀하면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로군!” 하면서 흐뭇해 하였다. 드디어 이안눌은 벼슬이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고 홍문관, 예문관 양 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면서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 명망이 높았다. 현 동국대학교 학림관 사범대학 좌측에 위치한 이곳은 조선조 선조년간의 대표적 시인의 한 분인 동악 이안눌의 유지가 있었던 곳 이다. 동악과 함께 교우하고 그를 흠모하던 당대 문사들이 모여 이곳에 시단을 이룬 연유로 후일 영조 임금이 24대손 주진(周鎭)으로 하여금 동악선생 시단이라 는 여섯 글자를 암면에 음각케 하였다. 수년전 계산고시학사를 신축하면서 이 유적을 잘 보존코 자 하였으나 오랜 풍상으로 마애암면이 훼손되매 이를 안타까이 여기면서 동국대학교 관계자들이 동악이라는 이름과 동악시단의 유래를 잘 알게 하고자 이 돌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데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