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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조박(趙璞, 157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자는 숙온(叔薀), 호는 석곡(石谷). 세찬(世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硬)이고, 아버지는 희윤(希尹)이며, 어머니는 성순원(成順元)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이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4년(광해군 6) 공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배천현감을 지내고, 1617년 무장현감이 되었으나 우패(愚悖)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18년 평안도도사가 되었으나, 역시 정치적으로 대북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25년(인조 3) 나주목사로 나갔으나 어리석다 하여 탄핵을 받고 해임되었으며, 이듬해에도 봉상시정으로서 탄핵을 받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
2)조성복(趙聖復, 1681∼17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극(士克), 호는 퇴수재(退修齋). 박(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소(見素)이고, 아버지는 감역 시채(始采)이며, 어머니는 최득일(崔得一)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정언을 지냈다. 1716년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거(尹宣擧)의 선정(先正) 칭호를 금할 것을 청하였고, 이후 장령·헌납을 지내고, 1721년(경종 1) 집의로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같은 해 헌납이 되어 윤선거의 유집(遺集)에 잘못된 문자가 있으니 훼판할 것을 청하였다. 그 해에 다시 집의가 되어 경종에게 세제(世弟 :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요구하는 소를 올려 노론의 지지를 받아 그 결정을 보았으나, 소론측이 무군부도(無君不道)의 죄로 몰아 의금부에서 배후를 캐는 국문을 받고 다음해 정의(旌義)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 대리청정문제는 신임사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723년 다시 잡혀 올라와 옥중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신임사화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조 즉위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3)조견소(趙見素, 1610∼167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자는 자장(自章), 호는 성강(星江). 아버지는 목사 박(璞)이다. 총명한데다가 학문에 힘써 능히 제자백가의 학문에 널리 통하여 문사(文詞)로 사우(士友)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 1639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지만 대과에는 누차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충원(忠原)의 벌판에서 거처할만한 곳을 정하고, 글과 역사를 자기의 업으로 삼아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덕행을 우선으로 하고 문예를 뒤로 하였으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출입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학도예부(學徒禮部)에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받았다. 그 뒤 여러 곳을 역임하다가 금구현령에 이르렀는데 이를 싫어하는 자들이 해치는 바가 있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성품이 조용하고 과묵하였으며, 또한 친구들과 교유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존귀하고 현달한 가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백성들에게 위엄으로 몸소 기율을 지켰고 자혜로 다스려 명성과 업적이 널리 퍼졌다. 문장은 예스러운 아담함을 좋아하였고 시는 더욱 깊은 조예를 가졌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전념하여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
저술은 거의 산일(散佚)되었고 유고(遺稿) 약간이 가장(家藏)되었으며, ≪기년통고 紀年通攷≫에 12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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