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이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5세 때에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권세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26세(1460) 때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1463)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여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 遊金鰲錄≫에 남겼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숙종 33년(1707)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동 8년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2)김효종(金孝宗, 1414~1493)
호는 우옹(迂翁), 본관은 광산, 통훈대부(通訓大夫)·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있을 때 단종의 선위를 보고 홍산현 운산에 은거하였다. 1465년(세조 11) 단종이 죽자 궁검대에서 3년간 상복을 입었다. 매월당 김시습과 사귀고 1493년(성종 24)에 세상을 떠났다. 홍산의 청일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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