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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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합호서원(合湖書院)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합강리 105
   안 향(安 珦)
   1716년(숙종 42)
   
   9월 12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41호(1984.05.17지정)
합호서원은 1716년(숙종 42)에 연경신, 안경인, 안경정 등이 고려 말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한 곳이다.
그러던 중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합호사를 건립하여 안향의 영정만을 춘추로 향사하였다.
1931년 후손 안배호 등이 유림의 동의를 얻어 서원을 복설키로 협의하던 중에 후손 연호, 봉호, 승헌 등이 계속 증축하여 1949년 전극 218향교의 동의를 얻은 후 서원을 복설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연기유림회의 주관으로 9월 12일 문성공 휘일(諱日)을 기하여 향사하고 있다. 1984년 5월 17일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1)주벽-안향(安珦, 1243∼1306)
합호서원6.jpg
고려 후기의 명신(名臣)·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성윤(成允)의 딸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변경되었다.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郎)을 제수 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해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 (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해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1303년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해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합호서원은 북의 출동산 자락이 남으로 흘러 끝을 맺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양쪽으로 실개천을 두고 그 건너 쪽으로 구릉이 솟아 서원을 감싸고 있다. 좌향은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안향의 영정과 친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