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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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뇌암서원(雷巖書院)
   연기군 전의면 관정리(燕岐郡 全義面 觀亭里)
   
   1699년(숙종 25)
   
   
   연기군 향토유적 제 37호
전의면 소재지에서 69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2km정도 가면 도로의 서쪽으로 觀亭里 사관정마을이 나온다. 문목사는 마을 중앙에 위치한다. 문목사는 상현사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양 측면에는 박공 밑에 방풍판을 설치하였고 전면 1칸은 튓마루로 이용하고 있으며, 2단의 화강석 재로 만든 축대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올렸다. 처마는 겹처마를 하고 있으며, 서원 주변으로는 낮은 담장을 돌려 보호시설을 해놓았다. 사우의 내부에는 위패를 모셔놓았고 雷巖書齋라는 현판이 있으며, 어칸 상면에는 文穆祠라는 현판이 있다. 원래 조선 肅宗祖에 타우 이상이 1686년(肅宗 12)에 기미환국 때 옥사하자 그의 문하생인 대곡 신후윤이 향의로 雷巖祠를 創建하였다. 이후 1717년(肅宗 43)에 타우의 동생 李翊과 조카인 李逸成을 종향하고 삼현사로 개칭하였다. 현재의 문목사 동쪽으로 개간된 밭에 삼현사터가 남아 있다. 영조 조에 이르러 삼현사에 타우의 문하생인 신후윤과 홍방을 추가 종향하고 뇌암서원이라 개칭하였다. 그러던 중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1883년(高宗20) 후손에 의하여 打羽祠堂으로 복원되었다. 뇌암 서원 터로 전하는 곳은 현재 문목사 동북쪽의 야산을 넘어 벼락바위 아래 해당한다.
우봉이씨 가운데 전의현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본 서원에 배향된 이상으로 이승건의 5대손이며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산림신으로 천거되어 조정에 불려갔던 호서지역의 대표적 사림이다.
생장지는 서울 근교 신도읍(神道邑) 화전(花田)이고 만년에 전의면 관정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1674년(숙종 1)에 자원대비의 상복을 입는 문제로 제 2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을 때 서인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그는 대공설을 주장하다가 송시열등과 함께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의 집권이 시작되자 다시 기용된 후 이조참판에 올랐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1690년(숙종 16) 옥에 갇혀 사망했다. 이상의 만년 근거지였던 관정리에는 이상이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뇌암서당’ 혹은 ‘사관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있었다. 이상이 옥사한 뒤 이를 애석하게 여긴 문하생 대곡 신후윤(愼後尹)등 근방의 많은 선비들이 1699년 향론을 일으켜 사우(문목사)의 창건을 발의하여 창건을 보게 된다.(『서원가고』) 이같은 사우의 창건은 이상이 당론의 피해를 입고 옥사한 뒤 1694년(숙종 20) 서인이 재집권하고 1695년 민진후(閔鎭厚)가 타우의 억울함을 아뢰어 특명으로 복관이 되었던 사정과 연결된 것이다.
창건당시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사관정이 유지가 되므로 사관정의 위치가 사우의 창건당시의 위치였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창건후 15년만인 1704년(숙종 34)에 사우에 대한 상소가 있어 훼철되었고 뿐만 아니라 훼철된지 두달만에 전의현에 다시 사우 설립을 발의한 유생이 처벌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노론세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후 상황이 바뀌게 된다. 즉 1717년(숙종 43) 왕이 온양의 행궁에 거동하자 노론계의 호서 유생들이 타우의 억울함을 상소하게 되었고 이에 왕은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1717년(숙종 43) 사우를 복설하였으며 이해에 타우의 동생 이익(李翊)과 조카인 이만성(李晩成)을 종향하게 된다. 그러나 숙종이 승하하고 신축사화로 이상의 관작이 추삭되었고 1725년(영조 1)에 이르러서 복관되었으며 이때 서원 건립을 발의하였던 제자 신후윤과 풍계 홍방(楓溪 洪芳)을 추향하게 되었다. 1865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다른 서원들처럼 훼철되고 다만 1886년(고종 23)에 영의정 심순택이 상소한대로 계속해서 제사를 모시는 은전을 명하였다.

이상(李翔)
1620(광해군 12)∼1690(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車)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愚). 유겸(有謙)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을 통하여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1658년(효종 9)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산림직(山林職) 진선을 역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의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1681년에 사업이 되고, 그뒤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연간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할 때에는 송시열을 따라 노론의 편에 서서 남인의 등용을 주장하는 소론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먼 친척 유두성(柳斗星)의 음행사건을 고발하였으나 증인을 교사하고 재산을 탐냈다는 죄로 처벌받고,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 옥사하였다.
1717년 서인들의 두호로 복관되었으며,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전의의 뇌암서원(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이익(李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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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인조 7)∼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우(季羽), 호는 농재(農齋). 호조참의 이유겸(李有謙)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3)에 진사가 되고, 165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설서‧사서를 거쳐 1659년 정언이 되어 대신이 술을 마시고 실태하는 것을 논박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사간(司諫)이 되어 송시열을 무고하는 영남유생 유세철(柳世哲) 등을 탄핵하였다.
그뒤 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674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유배되면서 같은 서인으로 지탄을 받다가 1679년 양덕(陽德)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동부승지에 보직되고, 이어 대사헌‧홍문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682년 형조‧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사직하자 함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뒤 다시 광화부유수‧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8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광주부유수가 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기사환국 등으로 민암(閔黯)이 정권을 잡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그도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서 배소에서 죽었다.
신의가 있고 높은 지조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수교집록(受敎輯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인 배향공간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