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翔)
1620(광해군 12)∼1690(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車)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愚). 유겸(有謙)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을 통하여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1658년(효종 9)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산림직(山林職) 진선을 역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의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1681년에 사업이 되고, 그뒤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연간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할 때에는 송시열을 따라 노론의 편에 서서 남인의 등용을 주장하는 소론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먼 친척 유두성(柳斗星)의 음행사건을 고발하였으나 증인을 교사하고 재산을 탐냈다는 죄로 처벌받고,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 옥사하였다.
1717년 서인들의 두호로 복관되었으며,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전의의 뇌암서원(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1629년(인조 7)∼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우(季羽), 호는 농재(農齋). 호조참의 이유겸(李有謙)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3)에 진사가 되고, 165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설서‧사서를 거쳐 1659년 정언이 되어 대신이 술을 마시고 실태하는 것을 논박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사간(司諫)이 되어 송시열을 무고하는 영남유생 유세철(柳世哲) 등을 탄핵하였다.
그뒤 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674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유배되면서 같은 서인으로 지탄을 받다가 1679년 양덕(陽德)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동부승지에 보직되고, 이어 대사헌‧홍문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682년 형조‧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사직하자 함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뒤 다시 광화부유수‧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8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광주부유수가 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기사환국 등으로 민암(閔黯)이 정권을 잡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그도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서 배소에서 죽었다.
신의가 있고 높은 지조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수교집록(受敎輯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