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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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암서원(花巖書院)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송동
   이 황(李 滉) 이문건(李文楗) 노수신(盧守愼) 김제갑(金悌甲) 허 후(許 詡) 전유형(全有亨) 박세무(朴世茂) 이신의(李愼儀) 박지겸(朴知謙) 허 조(許 稠) 유 근(柳 根)
   1622년(광해군 14)
   
   매년 9월 중정(中丁)
   
1622년(광해군 14)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 이문건(李文楗), 노수신(盧守愼), 김제갑(金悌甲)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38년(영조 14) 허후(許詡), 전유형(全有亨), 박세무(朴世茂), 이신의(李愼儀)를 추가 배향하였으며,그 뒤 박지겸(朴知謙), 허조(許稠), 유근(柳根)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6년 박동찬(朴東燦)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자는 경호(景浩)이며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이다.
1527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후 1543년에는 성균관 사성까지 승진하였으나 을사사화 후 병약(病弱)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에는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앙의 계속된 부름으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에는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풍기 군수로 재임 중에는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를 퇴관한 후에도 조정에서는 수십 회에 걸쳐서 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공조참판·공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우찬성·이조판서 등에 임명하였으나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1560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고 정하고 이로부터 7년동안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이황의 사후 선조는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였고, 향리에서는 도산서당 뒤에 서당을 지어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으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인 퇴계 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에 전파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609년 문묘에 종사되었고, 서원 제향도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2)이문건(李文楗, 1494∼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 함령(咸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생(叔生)이고, 아버지는 승문원정자 윤탁(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일찍이 중형 충건(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의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했다 한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건은 청파역(靑坡驛)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그는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1527년(중종 23)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때 전날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서경(署經)이 거부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협조로 관로는 순탄하였다.
1539년 장령을 역임하며 관기 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어,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 낭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성품이 근후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뒤에 이황(李滉)·조식(曺植)·성수침(成守琛)·이이(李珥) 등이 그의 시문을 즐겨 읊었다 한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3)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 : 정교하고 명확함.)해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 : 전하여 외워옴)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해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4)김제갑(金悌甲, 1525∼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언묵(彦默)이고, 아버지는 진사 석(錫)이며, 어머니는 기형(奇逈)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정자(正字), 병조좌랑, 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부사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領願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966년에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가 세워졌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5)허후(許詡, ?∼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하양(河陽). 윤창(允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조(稠)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박경(朴經)의 딸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충효(忠孝)로 명성이 높았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1428년 병조좌랑, 1431년 지평을 역임하였다. 그 뒤 143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좌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1442년 예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448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1451년(문종 1) 우참찬에 임명되어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의 산삭(刪削)과 윤색(潤色)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무하였다. 그 해 문종의 환후(患候)를 보살폈으며, 문종이 승하하자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어린 임금 단종을 보좌하였다.
1452년 9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려고 하자, 임금의 나이가 어리고 대군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이유를 들어 만류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지만, 그는 전일 수양대군에게 진언했던 일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던 그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무죄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고 훗날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끝까지 고사하다 결국 거제도에 안치된 뒤 교살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정단배식(正壇配食) 32인에 함께 향사되었다. 그리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6)전유형(全有亨, 1566∼16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아버지는 인(絪)이다. 괴산의 유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듬해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책략 10여조를 올려 선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재주를 인정받아 군자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사임하였다. 이 때 다시 민심수습방안 등을 상소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도 주목받아 1594년(선조 27) 특별히 청안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충청도조방장을 겸해 왜적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1603년에는 붕당타파·세자보호 등을 포함한 시사(時事)에 관한 15조목의 소를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605년40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감찰로 발탁되었으나 전란 중에 부모의 상을 의례에 맞게 치르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서용되어 함흥판관 등의 외직을 거쳐 분병조참의·광주목사(廣州牧使)·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세력을 다투던 임취정(任就正)과 결탁해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했으며 <오장도 五臟圖>도 그렸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문안사로 발탁되어 모문룡(毛文龍)에게 가서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운 연유를 설명하고 이를 주선했으며, 평안도를 내왕할 때 창성·의주 등 성의 방비상태를 아울러 살피고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동지중추부사 때 이유림옥사(李有林獄事)가 일어나자, 그를 석방해 벼슬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당류를 고변하게 하자고 청했다가 조정을 멸시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 무고를 받아 정상적인 절차도 없이 성철(成哲) 등 37인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42년(영조 18)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송집≫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7)박세무(朴世茂, 1487∼156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逍遙堂). 할아버지는 신동(信童)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중검(仲儉)이며, 어머니는 부사 이관식(李寬植)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가 헌납을 거쳐 사관(史官)이 되어 직필(直筆)로 당시의 세도가인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게 되어 1539년 마전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4년 전적(典籍)·참교(參校)로 복직되었고, 이듬해 사복시정이 되었다가 안변부사로 나갔으며 그 뒤 내자시정·내섬시정·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당시 국정을 전단하던 이기(李芑)가 불렀을 때 만나보지 않고 ≪동몽선습 童蒙先習≫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8)이신의(李愼儀, 1551∼16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부정(副正) 익희(益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간(侃)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원손(元孫)이며, 어머니는 정종(定宗)의 현손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운 공으로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가 합세하였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광해군의 폭정에 대해 극간하다가 유배되자, 그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 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 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 일대가 불안하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 해 형조참판에 올랐다. 이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해 강화로 가던 도중 병이 나 인천에 머물다가 수원 마정리(馬井里)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9)박지겸(朴知謙, 1549~1615)
자(字)는 익경(益卿), 호(號)는 애한정(愛閑亭), 본관(本貫)은 함양(咸陽) ‧ 소요당(逍遙堂) 박세무(朴世茂)의 손자(孫子)이다.
소요당(逍遙堂)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이며 그는 조부(祖父)에게 배워 그 연원(淵源)을 얻은바 있으나 일찍부터 과거(科擧)에 뜻이 없고 치산(治産)을 생각지 않으며 오직 학업(學業)에 전념(專念)하였으며 노모(老母)를 효양(孝養)함이 지극(至極)하여 그 어머니의 병(病)이 중하여 단지(斷指) 주혈하여 연명(延命)케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백의(白衣)로 호가(扈駕)하여 별좌(別坐)를 배(拜)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의 정치(政治)가 문란(紊亂)하여 벼슬을 버리고 세사(世事)를 등져 괴탄강 위에서 한거(閑居)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岩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10)허조(許稠, 1369∼143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판전객시사 수(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윤창(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李吉)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左補闕)·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1408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趙大臨事件)에 연루되어 춘주(春州)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 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 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 1415년 한성부윤·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제조, 1418년 개성유후사유후·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속육전 續六典≫의 편수에도 참가하였다.
1426년 참찬·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죽었다.
≪소학≫·≪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1)유근(柳根, 1549∼16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팽수(彭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潤)이고, 아버지는 진사 영문(營門)이며, 어머니는 안세언(安世彦)의 딸이다. 진사 광문(光門)에게 입양되었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3) 생원·진사 두 시험을 거쳐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 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그를 맞이해 대접하였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예조참의·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3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온조묘(溫祚廟)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경을 농단하고 1613년(광해군 5) 폐모론까지 일어나자, 괴산으로 물러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서경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사우(祠宇), 4칸의 재실(齋室), 정문(正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황을 주벽(主壁)으로 10현의 위패가 좌우에 배향되어 있으며, 정문 밖에 있는 재실은 유생들의 학문토론장소 및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괴산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