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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최운(崔澐, 1500∼15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운지(澐之). 호는 삼지(三池). 대대로 전의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김정(金淨)과 같이 공부하였다. 1518년(중종 1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진출하였는데, 당시 현량과천목(賢良科薦目)에서 지조와 행실이 바르고 학식과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횡간현감이 되어서는 정사를 바르게 펴고 송사(訟事)를 사리에 맞게 처리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잘 따랐다. 이에 임금이 옷감 한 벌을 내려 격려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이듬해 이신(李信)이 고사(告辭)에서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중에 있을 때 “나를 받아줄 사람은 최운과 영해부사 이윤검(李允儉)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고 하여 이에 연루,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전가족이 강계로 추방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죄가 풀리자 그의 아내가 유해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지냈다. 2)성운(成運, 1497∼157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비안박씨(比安朴氏)로 사간 효원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 진사에 합격, 1545년(명종 즉위년)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그 뒤 참봉·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선조 때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이지함(李之菡)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그가 죽자 선조가 제문을 내려 애도하였으며,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대곡집≫ 3권 1책이 있다. 3)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에는 다소 고답적이며 세상 사람에 대해 오만하였다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중년 이후 몸을 깨끗이 가지고 결의를 지키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해서 행실이 뛰어났다.”고 한 실록의 기사나 “사람됨이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났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을 정도로 높고 멀다.(亭亭物表 皎皎霞外)”라고 한 퇴계의 평가, 그리고 그 문인인 정구가 “선생은 천지의 순수한 덕과 하악(河嶽)의 맑은 정기를 타고났고, 재주는 일세에 높고 기개는 천고를 덮으며, 지혜는 족히 천하의 변화를 통하고 용맹은 능히 삼군의 우두머리를 앗을 수 있으며, 태산벽립(泰山壁立)의 기상과 봉황이 높이 나는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한 말로 보건대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단순히 학문에만 침잠하여 절의를 지키는 일절지사(一節之士)에 그치지 않고 천길 낭떠러지에 홀로 우뚝 솟은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서 세상을 근심하고 민생을 구하기 위하여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불의에 과감히 맞서는 재야의 비판자였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