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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박증영(朴增榮, 1464년(세조 10)∼1493년(성종 24).)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별명은 희인(希仁), 호는 눌재(訥齋). 예조참의 박미(朴楣)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현감 박영달(朴榮達)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486년 22세의 나이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얻었다. 그뒤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홍문관교리를 지냈다.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서법(書法)에 능하여 송설체(松雪體)에 특기가 있었다. 1488년 예빈시직장으로 있을 때 허종(許琮)을 따라 명나라 사신 규봉(圭峰)‧동월(董越)을 의주의 의순관(義順館)에서 맞이하였는데, 동월이 그의 시문과 필법을 보고 감탄하였고, 우아한 성품과 단정함을 기려서 ‘희인(希仁)’이라 이름하였다. 명나라의 부사 왕창(王敞)도 시에는 호연(浩然)의 기상이 있고, 글씨는 당나라 현종간의 천보서법(天寶書法)을 계승하였으며, 원나라 제일의 서예가인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잘 쓴다고 놀라워하였다. 강의(剛毅)‧정직의 기질이 있었고, 매우 청렴하여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았다. 청주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눌재유고(訥齋遺稿)》가 있다. 2)변경복(卞景福, 1538~1629) 조선중기의 효자이며, 중종 33년(1538)에 내수읍 비상리(비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탁이(卓爾)하여 나이 10세에 경전을 통독하였다. 9살 때 아버지를 잃어 그 몽상지절(蒙喪之節)의 애절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55세에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90세 노모를 업고 피난길에 나서니 왜장이 그 효행에 감화하여 피난지방(避難之方)을 지시해주고 효자의 향리에 병화(兵火)를 금하도록 명하였다한다. 모부인이 와병하자 극도로 상심하여 백방으로 문의구약(問醫求藥)하여 치유에 전력하였으나 결국 돌아가시니 3년을 오직 죽으로 연명하고 조석으로 성묘하였다. 그 때에 역질이 창궐하여 피해가 심했으나 공의 일문(一門)에는 아무 변고가 없었으니 효행지성에 감동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상이 끝난 후에도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拜謁)하고 기일이면10일전부터 재계(齋戒)하고 초종(初終) 때와 같이 애호(哀號)하니 공의 안면에 있는 눈물 자국을 보고 꿈속에 부모를 상봉한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출천(出天)의 효행을 향당에서 찬양하고 유림에서 천거하여 조정에 주신(奏申)하니 공의 나이 65세 생존 시에 정려(旌閭)가 포양(襃揚)되었다. 인조 7년(1629) 92세의 장수로 영면하니 북이면 영하리 주왕산 건좌원에 예장(禮葬)하였다. 변경복의 지극한 효행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