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
|
 |
신 식(申 湜) |
|
 |
1695년(숙종 21) |
|
 |
|
|
 |
|
|
 |
|
|
|
|
 |
쌍천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신식(申湜)을 배향하고 세운 서원으로 원생은 15인을 두었다. 그러나 1871년 철폐되었는데1915년 유림에서 복설하였고, 1989년에 고령 신씨 문중에서 다시 세운 뒤 영정을 봉안하였다. |
|
 |
1)신식(申湜, 1551∼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지(叔止), 호는 용졸재(用拙齋). 신숙주(申叔舟)의 5대손이며, 광윤(光潤)의 증손으로,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중엄(仲淹)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일파로 탄핵되어 유배당하였다가 1592년 다시 집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로 활약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좌부승지·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대사간과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599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호조참판·대사헌이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고는 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또 다시 사은사로 명에 가서 왜의 실정을 알렸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의례고증 疑禮攷證≫·≪가례언해 家禮諺解≫ 등이 있다.
|
|
 |
지금의 서원은 1989년에 복원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간 양회방에 쌍문을 달고 쌍천서원(雙泉書院)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
|
 |
1)신식(申湜)영정 이 서원에 봉안된 신식의 영정은 관복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110cm, 세로 171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인데 제작연대와 화가는 미상이다. |
|
 |
참고-청원군지편찬위원회, ≪청원군지≫, 2006.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