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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이득윤(李得胤, 1553∼1630) 조선 중기의 역학자(易學者)·악인(樂人).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고려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우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의성현령을 지냈다.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부(賦)·기(記)·시(詩)·서(書)·악보·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 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현금동문유기≫ 외에 저서로 ≪서계집 西溪集≫·≪서계가장결 西溪家藏訣≫이 있다. 특히, 정두원과 나눈 서한의 내용을 담은 ≪현금동문유기≫는 ≪안상금보 安常琴譜≫·≪조성금보 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윤승임(尹昇任, 1583∼1688) 호는 주일재(主一齋)이다.
3)박곤원(朴坤元, 1477∼1607) 상서공 박선(尙書公 朴善)의 16세손으로(문원공파) 호(號)는 옥계(玉溪).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 전념한 학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의 옥화서원(玉華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4)윤사석(尹師晳,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돈암(遯菴).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그는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이이(李珥)의 행장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