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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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죽계서원(竹溪書院)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 이보흠(李甫欽)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王於) 영풍군 이천(永豊君 李瑔)
   1738년(영조 14)
   
   
   
죽계서원은 1738년(영조 14)에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 이보흠(李甫欽)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1792년(정조 16)에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을 추향하고, 정조 29년(1799)에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王於), 영풍군 이천(永豊君 李瑔)을 다시 추향하였다. 고종 6년(1869)에 철폐되었다가 1960년에 다시 세웠다.

1)주벽-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 1426∼1457)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유(瑜). 아버지는 세종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인 방번(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와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해 왕위를 선양받았다.
이듬 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 때 그도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에 육종영(六宗英 : 안평대군외 6인의 종친에게 神主配享을 내린 일)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도 괴산군 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2)이보흠(李甫欽, ?∼145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현보(玄寶)이다.
1429년(세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는 사정(司正)으로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박사를 역임하고,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해,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대구 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 ‘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그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했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해 임기를 마쳤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 2) 장령에 초배(超拜)되었고 1454년(단종 2) 직예문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수의 기주관이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몰아낸 이후는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1457년(세조 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와 함께 재향품관(在鄕品官)·군사(軍士)·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 사인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박천에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되었다.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유방선(柳方善)에게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한 점, 길재(吉再)의 묘에 문제(文祭 : 以文祭之함)를 지낸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 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해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한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 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영주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3)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
조선 초기의 왕족·서예가.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좌부대언(左副大言)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1430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六鎭)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다. 권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首陽大君)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 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대군은 이의 회복을 위하여 힘썼으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황보인·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1747년(영조 23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를 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뛰어난 천분을 타고난데다 궁중에서 생장하는 과정에서 내부(內府)에 소장된 많은 진적(眞蹟)을 보고 수련하였으며, 그 스스로 서화수장에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 保閑齋集≫ 화기에 의하면, 모두 222축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따라서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에게 명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서화계에 큰 역할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진적으로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에 실린 것과 각첩(刻帖)으로 전하는 것이 적지 않다. 또한 동활자에서 1450년 주조한 경오자가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가 사사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물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여주 영릉(英陵)에 있다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있는 <세종대왕영릉신도비>, 용인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 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의 <임영대군묘표 臨瀛大君墓表>가 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4)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1425∼?)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영(瓔). 자는 양지(良之). 세종의 아홉째로,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姜氏)이다. 박중손(朴仲孫)의 사위로 박팽년(朴彭年)의 매부이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에 봉해지고, 1436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41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민가 여인에게 남복(男服)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였다.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나, 1449년 조관(朝官)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 이듬해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다. 1455년(단종 3)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첩 초요경(楚腰輕)과 사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부처(付處)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같은 해 세조가 즉위하면서 대간(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혜빈양씨(惠嬪楊氏)와 결탁해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1456년 사면되었지만, 그 해 상왕(上王 :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해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했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 : 단종)이 교살(絞殺)되자 이에 연루되었다. 1482년(성종 13) 성종의 호의와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 윤사흔(尹士昕) 등의 찬성으로 외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484년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에 따라 중앙과 지방 등 편리한 곳을 택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선원록 璿源錄≫에 이름만 오르고 관작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 13) 손자 윤(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했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일찍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의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15)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5)한남군(漢南君, ?∼1457)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어(王於). 자는 군옥(群玉). 세종의 넷째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혜빈 양씨(惠嬪楊氏)이다. 부인은 예빈녹사(禮賓錄事) 권격(權格)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세종이 왕비와 더불어 온수현(溫水縣) 가마곡(加陵谷)에 행차하였을 때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궁궐의 수비를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한남군에 봉하여졌다. 1450년(문종 즉위년) 개성부(開城府)의 상인 건직(乾直)의 가산을 탈취하였다는 명목으로 종부시(宗簿寺)로부터 송사(訟事)를 당하였으나 결국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가 건직이 살아 있을 때 건직에게 재화를 주어 식리(殖利)를 꾀하려 하였으나,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인하여 그 책임을 물어 재산을 취하여온 것인데 건직의 아내 고온(古溫)이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승손(李承孫)의 비(婢)였던 까닭에 승손의 사주를 받아 종부시에 고한 사건이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영풍군(永豊君)·혜빈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금산에 유배되었고, 아산에 이배(移配)되었다. 그 뒤 모든 전토(田土)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1457년 10월 배소(配所)인 아산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6)영풍군 이천(永豊君 李瑔, 1434∼1457)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천(瑔). 세종의 여덟 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혜빈양씨(惠嬪楊氏)이다. 한남군(漢南君) 어(王於)와 수춘군(壽春君) 현(玹)의 동생이다. 부인은 형조참판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영풍군에 봉군되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와 함께 1453년(단종 1) 10월의 계유정변 이래로 정치·군사권을 장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왕위에 나아가려는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과 대립하여 단종과 그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혜빈양씨·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등이 제거될 때 이와 관련되어 예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안성에 이배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에 의한 단종 복위사건을 계기로 가산과 고신(告身 : 관원의 임명 사령장)을 몰수당하고 임실에 안치되었으며,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의 단종 복위기도가 탄로되면서 죄가 더하여져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통제하던 형벌)되었다가 살해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에 있다. 1712년(숙종 38) 단종의 복위와 함께 관작이 복구되면서 신원(伸寃)되었고, 1743년(영조 19) 정렬(貞烈)의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1791년(정조 15) 호남유생의 상소를 계기로 단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0년에 중건하고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양회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고, 죽계사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마당앞에 성인문(成仁門)이라고 이름한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그리고 바깥마당에는 1960년에 세운 죽계서원유적비가 있으며 앞에 죽계서원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있다.

1)죽계서원유적비
1960년에 세우고 성균관장 박중훈이 짓고 이성목이 썼다.
참고-청원군지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