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1540(중종 35) ~1603(선조 36)]| 흔히들 '양강(兩岡)'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양강이란 동강 김 우옹 선생과 한강 정 구(寒岡 鄭逑) 선생을 말한다. 두 분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동강은 1540년생, 한강은 1543년생) 벼슬과 학행이 시대를 주름잡은 것이 비슷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 두분을 근세조선 중엽 이후 성주의 대표인물로 친다. 성주군 10개 읍면 중 대가면은 동강, 한강 등 큰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대가(大家)'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동강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고려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의 후손으로 절제사(節制使)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의 7대손이요, 삼척부사를 지낸 칠봉 김희삼(七峰 金希參)의 넷째 아들로 1540년(종종 35년),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思道谷)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뛰어나게 잘 나고, 기질이 단아하며 말하는 것이나 노는 것이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일찍부터 가정교육을 받아 문장이 뛰어나고 남명 조 식(南冥 曺植)의 문인으로 심경근사록(心經近思錄)을 배우고 이어서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의 제자가 되어 퇴계의 높은 학문의 정맥(正脈)을 이어 받았다.
화려한 벼슬살이 1558년(명종 13년), 19살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7년(명종 22년), 28살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않고1572년(선조 5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입시(入侍)하여 임금으로서 흥학(興學)의 마음 가짐을 극진히 강론(講論)하여 왕의 총애와 예우(禮遇)를 받아 수찬(修撰),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573년(선조 6년), 대제학(大提學) 김귀영(金貴榮)에 의해 김효원(金孝元), 허 봉, 홍 적(洪 迪)과 함께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직제학(直提學), 삼사(三司 : 대사성, 대사관, 대사헌 「大司成, 大司諫, 大司憲」), 양관(兩館 : 홍문관, 예문관, 「弘文館, 藝文館」), 제학(提學)을 거쳐 예·이·형조참판(禮·吏·刑曹參判), 1588년(선조21년),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것을 정사(政事)의 근본으로 하여 선정을 베푸니 안동부민은 선생이 떠난 후 사모하여 추사불망비 (追思不忘碑)를 세웠으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일으켜 반역하니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로 연루(連累),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어 독서와 저술(著述)로 세월을 보내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이 풀려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로 가서 부호군(副護軍),병조참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성, 대사헌, 교정청당상(校正廳堂上),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 벼슬을 내놓고 인천(仁川)으로 물러나니 따르는 학자의 무리가 많았다. 1601년(선조 34년), 청주(淸州)의 송곡(松谷)으로 옮겼는데 여러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선조 36년) 11월에 돌아가니 향년 64세였다.
저 술
1589년(선조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 :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 회령으로 유배되었는데 선생이 이 정여립 모반(謀反) 사건에 연루된 것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정여립과 선생을 같이 천거한 일이 있어, 서로 친분이 깊으니 역모에도 가담했을 것으로 짐작, 집을 수색했으나 아무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고 안동부사직을 뺏고 유배를 보낸 것으로 이 기축옥사를 담당, 처리한 책임자가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었다. 두 사람을 추천한 노수신이 정승에서 쫓겨났음은 물론, 이 사건으로 동인(東人)의 세력은 크게 꺾이었다. 1592년, 귀양이 풀릴 때까지의 3년을 선생은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그 대표작이 속강목(續綱目) 15권으로 그 각판(刻版)은 고향인 대가면 사도실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집(文集) 10권과 경연강의(經筵講義) 등 저서가 있고 옥당(玉堂)으로 있을 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 존심양성잠(存心養性箴)을 짓고 귀양에서 풀려 의주 행재소에 가서 병조참판으로 복직되어 비어기무칠조(備禦機務七條)를 지어 올렸다.
인재 추천과 무고 입은 사람을 구하다.
선생이 부수찬(副修撰)으로 입시(入侍)하였을 때, 선조께서 학행이 뛰어난 인재를 묻기에 동향 친구요, 학행이 걸출(傑出)한 한강 정 구(寒岡 鄭逑)를 천거(薦擧)하여 선조께서 한강을 불러보시고 한강을 출사(出仕)하게 하였으며, 1583년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병조판서 이 이(李珥 : 율곡)의 직무상 과실을 탄핵하다가 유배된 박근원(朴謹元 : 평안도 종성으로 유배), 송응개(宋應漑 :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 등의 원지(遠地) 유배가 과중함을 영의정 노수신과 함께 주청하여 구하였다. 1589년, 최영경(崔永慶)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무고를 입고 정 철의 국문을 받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신원(伸寃)하게 하는 동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우의정 유 홍이 용렬, 무능하고 사리사욕을 탐하며, 정철이 어진 사람을 죄로 얽어 죽인 것을 논박하여 벼슬에서 쫓겨나게 하고, 1598년(선조31년), 류성룡(柳成龍)이 영의정으로 무고를 입어 장차 불측한 화를 입게 된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남의 억울한 일에는 발벗고 나서서 해명하는 그였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는 지극히 담담하고 호방(豪放) 하였다.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 회령에 귀양가면서 지금의 영주(榮州)에서 형 우굉(宇宏)과 이별할 때, 이들 형제의 이별 장면을 보고 남들은 모두 눈물을 지웠으나 선생은 오히려 태연하였다. 또한 가는 도중 함경도 마천령(摩天嶺)에서 중봉 조 헌(重峰 趙憲)을 만났는데 조 헌이 "이곳에 오니 후회되는 일이 없느냐?" 고 물으니 선생은 "공론(公論)은 마땅히 후세에 기다릴 일이지 어찌 한 때의 위세로써 그 옳고 그름을 정할 것이냐?" 란 말로 정색하고 대답하였다. 조 헌도 손을 떨치며 일어나서 "조정의 당로(堂路)한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죄를 덮어 씌워 귀양보내다니……." 하고 소리쳐 말하였다. 하루는 금오랑(金吾郞)이 갑자기 회령에 들이닥치니 "선생에게 죄를 더하여 사약(死藥)이 내렸나 보다."고 회령부중이 발칵 뒤집혔는데도 선생은 그저 태연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평양, 의주로 몽진(蒙塵 : 임금의 피난)하게 되어 선생의 귀양을 풀어준다는 기쁜 소식을 금오랑이 전하러 내려온 것인데 함경도의 회령 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조차 감감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후(死後)의 일들
1603년 11월, 선생이 돌아가자 조정에서 선생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이조판서, 대제학(大提學)을 증직(贈職)하고 숙종 때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행장(行狀)은 동향 친구 한강 정 구가 기록하고, 그 끝에 장현광이 덧붙여서 행적과 선생의 기개(氣槪)를 더 적어 넣었으며, 신도비 (神道碑)는 선생의 무덤이 있는 대가면 옥화동 능꼴마을 입구에 세워졌는데 이조판서 갈암 이 현일(葛菴 李玄逸)이 글을 짓고, 영의정 미수 허 목이 전서(篆書)를 썼으며, 비를 얹은 커다란 돌 거북은 울산서 운반한 돌로 깎은 것이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과 회연서원(檜淵書院), 회령의 오산서원(鰲山書院),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경성의 함지서원(咸池書院), 종성의 동강사(東岡祠)에 제향되었으며, 특히 청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동짓달 열 나흗날 군내 전 유림 및 기관장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서원 옆에는 선생의 가묘(家廟)가 있고,서원앞 서고(書庫)에는 속강목(續綱目) 10권과 문집(文集) 5권의 각판(刻版 : 배나무를 소금 물에 삶아 글을 새긴 것)이 있다.
2) 신용(申涌) 1561년(명종 16)∼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계수(季收), 호는 하은(霞隱).
조부는 신서(申漵)이고, 부친은 신중엄(申仲淹)이다. 대사헌(大司憲) 졸재(拙齋) 신식(申湜)의 종제(從弟)이며,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의 사위이다. 선조 조(宣祖朝)에 문과(文科)에 등제한 뒤 벼슬은 한림(翰林)‧군수(郡守)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아들은 신득패(申得沛), 주서(注書) 신득유(申得游), 함경도사(咸鏡都事) 신득홍(申得洪), 신득명(申得溟)을 두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증직받았고 청주(淸州)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의례고람(儀禮考覽)》, 《상례통재(喪禮通載)》, 《오복통고(五服通考)》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3) 신집(申潗.1623~1688) 본관은 고령이다. 자는 노천(老泉), 호는 종산(鐘山). 어려서 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심이 지극하였고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남들과 달라 주위로 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전한다. 9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애통해하며 통곡하는 것이 어른보다 더하여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언어와 행동이 어느 하나도 부모님 말씀에 거슬림이 없었다고 전한다. 3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동설한에도 날바닥에 기거하며 주야로 통곡하였고 3년간 고기와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고 죽만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효도에 대한 미담이 주위에 퍼지자 그의 효행을 관찰사가 임금께 상소하여 정려 하였다. 현재 정려비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에 있다. 순조 7년(1807) 효행으로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광무2년(1989)에 효열각을 중수하였다 전하다. 묵정서원에도 배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