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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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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이종학, 모암 김덕숭, 송애 이여, 행원 이부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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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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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음력 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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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신잡(申磼)이 세종대의 효자 김덕숭을 제향하기 위해 1597년에 세웠던 서원의 터.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으며, 현재는 그 위치에 사적비가 그 유적을 말해주고 있다. 사적비는 거북대좌 위에 높이 176cm너비 66cm 두께34cm의 오석비신에는 화강암 난간을 둘렀다. 진천에서 학문과 효행이 높았던 이종학과 모암 김덕숭, 송애 이여, 행원 이부 선생 등 4위를 모시는 서원으로 존속하였다. 백원서원은 모든 행동 중에서 가장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신잡(申磼) 1541년(중종 36)∼1609년(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준(伯俊), 호는 독송(獨松)이며1584년(선조 1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우부승지를 거쳐 이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비변사당상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을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관내 철산군에 탈옥사건이 발생하여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593년 다시 기용되어 밀양부사‧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特進官)‧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00년에는 호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 겸 세자빈객이 되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빙고제조(氷庫提調) 등을 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평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606년 개성유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에 진천에 사당이 세워지고 사액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노년에 노원리로 낙향하여 백원서원과 백원정을 세워 후학양성에 힘썼다. 한편 신잡이 노년에 이월면 노원리 무제봉 아래로 낙향하여 살았으므로 이곳을 노은이라 불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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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학(李鍾學)1361년(공민왕 10)∼1392년(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이곡(李穀)의 손자이며,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다. 그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1388년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신(助兵六丁神: 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아버지 색이 정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색이 탄핵을 받게 되자, 더불어 폄출(貶黜)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모두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사면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원지로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었으나,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이해 조선이 들어서면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가 판관으로 있어서 그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다. 2) 김덕숭(金德崇) 1373년(공민왕 22)∼1448년(세종 3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수(子修), 호는 모암(慕庵). 송도(松都)에서 출생한 그는 판윤(判尹) 김천익(金天益)의 아들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고려가 멸망하자, 아버지 김천익은 송도판윤(松都判尹)의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백곡면(栢谷面) 석현리(石峴里) 추자(楸子) 마을로 낙향하였다. 김덕숭은 21세에 추천되어 진선(進善)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비롯하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온양군수(溫陽郡守)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귀향하여 부모 봉양에 힘썼다. 1426년(세종 8)에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제수되었지만 부모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소홀해짐을 염려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더욱더 효성을 다하였다. 그의 나이 6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조석으로 부친께 드리는 문안인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이에1444년(세종 26), 세종은 그의 지극한 효성을 가상히 여겨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충청감사(忠淸監司)에게 명하여 쌀 10섬을 주라고 하였다. 죽은 후, 그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또한 세종은 그에게 어제시(御製詩) 3수를 내렸고 그의 효행을 《삼강행실(三綱行實)》에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 정려는 지금 이월면(梨月面) 사곡미(沙谷里) 사지(沙池) 마을에 있다. 1449년(세종 31) 6월에는 그의 두 아들 김귀식(金貴識)과 김귀시(金貴試)에게 벼슬을 내렸다. 1597년(선조 30)에 그는 이종학(李鍾學)‧이여(李畬)‧이부(李阜)와 함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배향되었고, 1669년(현종 10)에는 진천 유생이 올린 소(疏)에 따라 사액되었다. 후에 김덕숭의 모친이 병환 중에 있을 때, 잉어가 튀어나왔다는 일화 속의 여계소(女溪沼)에 그의 21대손 김동휘(金東輝)가 백원정(百源亭)을 지었다. 3) 이여(李畬)1503년(연산군 9)∼1544년(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추(有秋), 호는 송애(松厓).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이인로(李仁老)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박지생(朴枝生)의 딸이다. 일찍이, 김안국(金安國)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고,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문한관(文翰官)에 임명되었다가 1539년 정언이 되었고, 2년 후에 지평이 되었다. 1544년 문학으로 죽었는데, 재직중에도 학문연구에 힘써 역학(易學)에 정통하였다. 형 이치(李菑)와 함께 진천에 거주하면서 그 지방의 풍속교정에도 힘썼다고 한다. 진천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4) 이부(李阜)1482년(성종 13)∼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릉(子陵), 호는 행원(杏園, 또는 杏院). 진천 출신으로 사과 이금(李嶔)의 아들이다. 사림파로서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고,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정언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 조광조 등과 함께 중종반정 공신에 대한 삭훈을 상소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아 양사가 사직할 때 병을 칭하여 사직하였다. 이해에 기묘사화로 사림들이 숙청당할 때에는 벼슬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그뒤부터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특히 1545년(명종 즉위) 현량과가 복설되어 병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진천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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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사우 6칸, 강당 6칸, 동서재 3칸, 전사청 4칸의 건물 규모에 원생 25명, 집사 10명, 모속 30명, 복호 3구의 정원을 갖추었다고 한다.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고 지금은 서원터에 신위를 매안한 봉분과 유허비가 남아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와 진천 유림들에 의해 제향이 봉행되고 있다.
백원정(百源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백원정(百源亭)은 진천읍 장관리 원장관마을 종박물관에서 오른쪽으로 약 200m 거리에 있는 백곡저수지 근처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백원정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신잡(申磼)이 세종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김덕숭(金德崇)[1373~1448]을 추모하여 백원서원(百源書院)이라는 사당과 함께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 지었다고 한다. 백원정이란 이름은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라는 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후 소실되었던 백원정을 1958년 김덕숭의 21세손인 김동휘(金東輝)가 김덕숭이 잉어를 잡았다는 여계소(女溪沼)의 동쪽 절벽 위에 다시 건립하였다. 현재 정자의 내부에 걸려 있는 「백원정 이전기(百源亭移轉記)」에 따르면 원래 백원정은 여계소, 즉 백곡저수지에 있었는데 장소가 협소하여 1994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백원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낮은 외벌대의 기단 위에 방형의 화강암 사각 주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웠으며, 서까래 위에 부연을 설치한 겹처마 지붕이다. 남남서향으로 배치된 정자의 전면은 출입을 위한 디딤돌을 한 단 설치하고 다른 삼면에는 평난간을 돌렸다. 기둥 위의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익공 머리는 몰익공으로 처리하였다. 모든 기둥에는 샛기둥을 문설주처럼 덧대었다. 전면과 후면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상부에 짧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게 하였다.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판대공을 놓고 상부에 종도리를 걸었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체를 간단한 가칠단청으로 마무리하였다. 백원정은 백곡저수지의 근처, 즉 현재 종박물관 뒤편에 자리하여 찾기가 어렵고 진입로 또한 정비가 미흡하다. 그리고 건물의 단청 또한 얼룩지거나 벗겨져 있어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진천군에서 소유 및 관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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