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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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하강서원(荷江書院)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홍이상(洪履祥)
   1786년(정조 10)
   
   음력 3월 10일
   
조선 선조 때의 명신 홍이상(洪履祥)의 덕을 기리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세워졌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은 후,하강서원 내에 다시 1903년(광무 7) 하강단소를 만들고 유림들의 제사가 이어왔다. 1974년에 사당을 건립하여 홍이상(洪履祥)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홍이상(洪履祥, 1549∼16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 계종(繼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우전(禹甸)이고, 아버지는 부사직 수(脩)이며, 어머니는 백승수(白承秀)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예조와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수찬·지제교·병조정랑 등을 두루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을 거쳐, 호당(湖堂)에 있을 때 왕이 유신(儒臣)들을 선발해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할 때는 꼭 참여하였다. 이어 집의·응교를 역임하고,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었다가 사간과 사인 등을 거쳐, 황해도안무사(黃海道安撫使)가 되었다.
1591년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된 뒤,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옮겨 왕을 호가(扈駕)해 서행(西行)하였다. 그리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가 성천에 도착해 병조참의에 전임하였다.
1593년 정주에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이듬 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좌승지가 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비변사와 긴밀하게 연락해 일본의 장군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 사이의 이간을 계획, 추진하기도 하였다.
1596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그러나 영남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자, 성혼을 두둔하다가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목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1612년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일파에게 밀려나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좌천된 뒤 그 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모당유고≫가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사당과 삼문만이 남아있던 구 건물을 이곳 유림들의 힘으로 1964년 복원하였다. 사당은 전면 3간, 측면 1간반으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92년에는 사당의 오른쪽에 서원을 크게 복원하여 하강서원이라 현판을 하였으며, 그 앞에는 雲山 豊山洪公承箕 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하강서원 현판이 붙어 있는 서원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획하여 중앙 3칸통칸을 넓은 우물마루 대청으로 했고 양단간은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4분합 띠살 들어열개문을, 대청 후면에는 쌍여닫이 판당문을 달았다. 구조는 낮게 축조한 기단 상에 정면 중앙 3개소에만 원형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뿔 주초석을 놓고 민흘림 방형주를 세웠는데, 기둥 상부에는 공포의 창방을 생략하고 간략화한 양봉만을 건물 내·외 방향으로 결구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위에 대들보 놓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짜 맞추었는데, 종량 상부에 사다리꼴 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5량 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참고-충주시사
한국향사연구전국협의회, ≪훼철서원조사보고≫, 199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주 체험학습의 장 http://exp1.cbchj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