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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교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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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자(朱 子) 송시열(宋時烈) 박광일(朴光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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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순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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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9월 중정(中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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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사주자갈필목판(南康祠朱子葛筆木板)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4호(1987.06.01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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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 송시열의 문인인 손재 박광일(遜齋 朴光一)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남강사(南康祠)라고도 한다. 남강서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송시열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해 1689년(숙종 15)에 제주도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때 강진의 성자포(지금의 남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려다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잠시 근처의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 머물며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였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1803년(순조 3)에 세운 것이 바로 남강서원이다. 당시 강진의 향유(鄕儒)들이 도관찰사(都觀察使)였던 한용구의 승인을 얻어 정읍 노암서원에 모셔져 있던 송시열의 영정을 백련사로 옮겨 봉안하고, 영당의 액호(額號)를 남강이라 하였는데 백련사의 영당이 남강서원의 전신(前身)이다. 1838년(헌종 4) 향림들의 발의로 사당에 주자를 정위봉향(正位奉享)하였으며, 1901년 현재의 위치에 신단을 설단(設壇)하여 주자와 송시열을 향사하는 한편 어필각을 건립하였고, 후에 박광일을 추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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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주자(朱子 : 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정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2)송시열(宋時烈 : 1607 ~ 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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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왼쪽에 구(舊)어필각이 있고, 그 앞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새로운 어필각이 신축되었다. 어필각에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된 남강사 주자갈필목판(南康祠朱子葛筆木版)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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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강사주자갈필목판(南康祠朱子葛筆木板)-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4호 (1987.06.01지정) 전라남도 강진의 성자포(星子浦)와 남강사에 관련된 목판. 40판. 송시열(宋時烈)이 기사환국으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폭풍으로 성자포(남포)에서 배를 못타고 인근 백련사에 머물면서 강론하여 ‘종강지지(終講之地)’가 된 탓에 1803년(순조 3) 백련사에 영당이 건립되었다. 이듬해 현 강진읍 평동리로 옮겼으며, 6년 뒤인 1809년 성자포 앞바다에 나무궤가 떠밀려 왔고 그 안에 ‘주자경재잠목판(朱子敬齋箴木板)’ 20매와 ‘대우수전(大禹手篆)’ 8매가 있었다. 강진현감이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으로 옮기던 중 수송 인마(人馬)가 남강사 앞에서 전복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사당에 소장하게 하였다. 광주(光州)목사 조철영(趙徹永)이 쓴 기문(大禹篆朱子筆敬齋箴板記)(1844)에 “명(明)이 망하고 중원이 혼란하여지자 뜻있는 선비들이 성현의 수적(手迹)이 오랑캐의 무리들에게 더럽혀질까 염려하여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으나 남만제도(南蠻諸島)로 가지 않고 우리나라로 왔으니 이는 필시 신명의 보살핌이라.”고 적고 있다. 1838년 주자상(朱子像)을 정향하고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1809년 표착한 ‘대우수전’과 ‘경재잠’은 9판이 소실되었고, 1844년에 조철영이 탑본모각(榻本模刻)하였으나 훼철 뒤 훼손되어1904년 다시 모각하였다. 지정된 목판은 모두 40판으로 ‘대우수전’ 4판, ‘경재잠’은 1809년 구판 10판, 1844년 모각판 9판, 1904년 모각판 6판 등 25판, 해자서판(楷字書板) 11판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교촌리 남강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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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남도답사1번지 강진문화관광 http://gangjin.go.kr/ 사진-강진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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