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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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박산서원(博山書院)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박산리 1103
   이후백(李後白)
   1590년(선조 23)
   
   (음)9월 17일
   강진군향토문화유산 제4호(2004.11.01지정)
1590년(선조 23) 강진읍 서산리 월남마을에 청연 이후백(靑蓮 李後白)을 제향하기 위해 서봉서원(瑞峰書院)이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다. 1924년 호남 사림들의 발의로 현 위치로 옮겨 박산서원(博山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창건 이후 1694년(숙종 20)에는 전라도 진사 김증(金甑)등이 청액소를 올렸는데 관철되지 않았다. 서원 등록은 1694년 10월10일에 등록되었고, 1712년 이후백의 제자인 백광훈(白光勳)과 최경창(崔慶昌)을 추배하며 제향하여 오다가 다시 1725년(숙종38)에 전라도 유생 김면(金冕) 등이 조정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 역시 관철되지 않았다. 그 후 1868년(고종5)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924년 본향인 호남 사림의 발의로 현재의 작천면 박산으로 옮겨 복설(復設)하고 액호도 ‘박산서원(博山書院)’ 이라고 개칭하였다.그리고 이후백의 동향(同鄕) 출신이며 함께 講道酬唱하고 經史을 토론하였던 임회(林薈)와 김순(金淳)을 추배하였고, 1964년, 1972년, 1981년에 각각 유림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이후백(李後白 : 1520∼157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관찰사 숙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원례(元禮)이고, 아버지는 국형(國衡)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주(酒)’자가 붙은 이상 상주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1535년(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李義健)·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에게서 배웠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宗의 妃)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의 합칭)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함안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시호는 문청(文淸)이다.
 
2)백광훈(白光勳 : 1537 ~ 1582)
조선의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세인(世仁)의 아들. 박순(朴淳)의 문인. 어려서 시재(詩才)가 있어 13세 때 상경(上京), 양응남(梁應南)·노수신(盧守愼) 등에서 사사(師事)했다. 1564년(명종19)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열중했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써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들어갔다 하여,삼당(三唐)으로 불렀다. 명필(名筆)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3)최경창(崔慶昌 : 1539 ~ 1583)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전라도 영암 출생. 충(冲)의 18대손이며 자(滋)의 13대손으로, 수인(守仁)의 아들이다. 박순(朴淳)의 문하이며, 백광훈(白光勳)·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고,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되었는데 뜻밖의 외직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 가난에 시달리다가 다음해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1582년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수(特授)하였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자 대간에서는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삼기 시작하였으므로 성균관직강으로 명을 고쳤다. 이에 상경 도중 종성객관에서 객사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수창(酬唱)하였으며, 또한 정철(鄭澈)·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였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또한,문장에도 뛰어나 이이·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4)임회(林薈 : 1508 ~ ?)
자는 헌가(獻可), 호는 죽곡(竹谷),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1540년(중종 35) 별시(別試) 병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장을 지냈으며 7주 목사를 거처 고을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고 옥배(玉盃)와 화개(華蓋)를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5)김순(金淳 : 1509 ~ 1578)
本貫은 광산(光山). 乙巳士禍의 수난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와 경학에 힘썼다. 손자 근(瑾)과 찬(瓚)은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장군 막하에서 진주성 사수하다 장열히 전사하였다.

경내의 건물은 외삼문, 강당, 고직사, 내삼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박산서원’현판을 단 강당이 위치하고 강당 오른쪽으로는 고직사로 보이는 살림집이 있다. 강당 왼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이 보이는데 내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박산사가 자리잡고 있다.


참고-박산사중수기(1925.유용구선). 서원중수기(1981.김용익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진군 홈페이지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