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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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수암서원(秀岩書院)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288
   이선제(李先齊) 이조원(李調元) 이중호(李仲虎) 이 발(李 潑) 이 길(李 洁)
   1820년(순조 20)
   
   9월 1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39호(1979.08.03지정)
1820년(순조 20) 이선제(李先齊), 이조원(李調元), 이중호(李仲虎), 이발(李潑), 이길(李洁)등 5현의 학문과 덕행을 숭앙하고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1년 임시로 설단 배향하였고, 1919년 오늘의 건물을 재건하였다.

1)이선제(李先齊,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보(家父). 기(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밀직제학 홍길(弘吉)이고, 아버지는 일영(日英)이다.
1419년(세종 1) 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1423년 ≪고려사≫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앞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 金鏡錄≫에 의거함으로써 사실(史實)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 그 실상을 직서(直敍)하도록 하였다. 1431년에 집현전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형조참의·첨지중추원사·병조참의를 거쳐 1444년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1446년 예조참의를 거쳐 한때 삼의사제조(三醫司提調)를 지냈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오르고, 1448년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고려사≫ 개찬을 감장(監掌)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 때 ① 서북지방의 군제(軍制) 정비, ② 야인의 객관(客館)을 별치(別置)할 것, ③ 어염세(魚鹽稅)를 확보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단종이 즉위한 뒤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어서는 전염병 방제에 노력하였다.
 
2)이조원(李調元, 1433~1510)
아호는 청심당(淸心堂)이며 필문 이선제의 둘째 아들로 1433년 세종 15년에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고아(高雅)한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학문이 대성하였고, 부친 필문의 학통을 이어 문장과 도학이 당세의 종사(宗師)라 추앙되었다.
조정에서 그것을 알고 두 번이나 벼슬자리에 불렀으나 불취(不就)하고 나중에 전라 경상 양도의 어사에 특명되어 어쩔 수 없이 벼슬길에 올라 가는 데마다 선정을 베풀었고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바른 정사를 하도록 상소해도 듣지 않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후진을 가르치는데 힘써 그 문하에서 박원형, 신승선, 이경균, 이원휘, 하숭, 고운과 같은 명신을 배출하였다. 점필제 김종직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공이 사는 원산리(院山里)를 「장자동(長者洞)」이라 명명하고 시를 써서 이르기를 「오원거족가(五元巨族家)에 일원둔적가(一元遯跡嘉)라 우문령세상(右文令世上)에 모사옥음하(母使玉音遐)」라 하였다. 특히 시문에도 뛰어나 단종폐위(端宗廢位)를 비탄한 “연화조(蓮花操)”와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우국충정을 읊은 「환향가(還鄕歌)」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국한문을 혼용한 최고의 시조로서 귀중한 국문 사료로 꼽힌다.
죽은 후 정헌대부 예조판서가 증직되고 강진 수암서원과 화순 오현당에 배향되었다.

 
3)이중호(李仲虎, 1512~1583)
자(字)는 사문(士文), 호(號)는 이소재(履素齋), 본관은 광주(光州), 공인(公仁)의 아들이다. 중종 7년에 남평(南平) 원적동(元積洞)에서 나서 명종 7년에 문과(文科)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선조 16년에 나이 72에 졸(卒)하니 묘(墓)는 남평(南平) 벽태동(碧苔洞)에 있고 남평(南平) 호암사(虎岩祠)에 향사(享祀)했다.
서봉유우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중종 35년(1540)에 생원이 되고 명종 7년(155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그해에 한림 옥랑을 거쳐10년(1555) 이조좌랑 그 후 대사간 전주부윤을 지내고 선조 6년(1573) 전라감사를 역임하였고 급 발 길 직 네 아들을 두었다.
 
4)이발(李潑, 1544∼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달선(達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인(公仁)이고, 아버지는 제학 중호(仲虎)이며, 어머니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1579년 응교, 1581년 전한,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홍가신(洪可臣)·허당(許鏜)·박의(朴宜)·윤기신(尹起莘)·김영일(金榮一)·김우옹(金宇顒)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士論)을 주도,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을 학립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또,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5)이길(李洁, 1547∼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연(景淵), 호는 남계(南溪). 달선(達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인(公仁)이고, 아버지는 제학 중호(仲虎)이며, 어머니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발(潑)의 아우이다.
생원시에 올라 1577년(선조 10) 태묘별시문과(太廟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사인을 거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형 발이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분이 차츰 멀어지자 서인들이 미워하므로 시사(時事)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고향으로 물러갈 때 함께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동인들에게 박해가 가하여져, 형 발·급(汲) 등은 모진 고문 끝에 장살되었고, 그도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뒤에 불려 와서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1694년(숙종 20)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1969년에 중건한 것으로 신실(神室)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이고, 앞에는 맞배지붕의 내삼문이 있는데 ‘숭모문(崇慕門)’이라 씌어 있다. 신실 오른쪽에 있는 재명실(齊明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이며 서고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과거에 서당으로 이용했던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이다. 외삼문은 정문과 후문이 있는데 정문은 1987년에 수해로 파손되어 중건하였고, 후문은 1987년에 문중에서 중건하였다.
서원 입구에는 5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40년에 세운 오현세덕비(五賢世德碑)가 있다.
참고-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