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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이건명(李健命, 1663∼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유록(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서(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 10권이 전한다. 2)이의천(李倚天, 1676∼175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립(斯立), 호는 박직와(樸直窩). 아버지는 통제사 택진(澤震)이며, 어머니는 임가재(林可材)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헌납·지평·장령·사간을 거쳐 1726년(영조 2)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할아버지 백(白)이 몸져 누었을때는 옆에서 100일을 간호하였으며, 임금을 섬김에는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었다. 신임사화 때에는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를 주살(誅殺)하기를 주장하는 계(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3)정동준(鄭東浚, 175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심(士深). 각선(覺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교(錫敎)이고, 아버지는 약순(若淳)이며, 어머니는 원경렴(元景濂)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0년(정조 4)에는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를 지냈다. 이듬해에는 응제(應製)에서 차석하여 향마장(鄕馬粧) 1부가 하사되었으며, 의정부 초계강제문신(抄啓講製文臣)에 발탁되었고, 직각(直閣)·한학교수(漢學敎授)를 역임하였다. 1782년에는 이조좌랑과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1785년에는 이조참의를 지냈고, 1787년에는 대사간을 역임했다. 1789년에는 경상도관찰사로 파견, 근무하였다. 1795년에는 권유(權裕)에 의해 탄핵되었으며, 이 후 음독자살하였다. 4)이인기(李麟奇, 1549∼16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인서(仁瑞), 호는 송계(松溪). 개국공신 청해백(靑海伯) 지란(之蘭)의 6대손이며, 부호군(副護軍) 순희(淳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걸(挺傑)이고, 아버지는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옥(沃)이며,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희증(希曾)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늦게 사마시에 합격하고, 도화서별제(圖畫署別提)로 출사,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형조좌랑 등을 거쳐 1605년에 보은현감, 형조정랑을 거쳐 영덕현감이 되어서는 치적이 우수하여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여러 가지 실정이 계속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동교(東郊)의 송계(松溪)로 나가 근 10년간 성문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1623년(인조1)의 인조반정과 함께 가평군수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아들 중로(重老)가 경기강원양도좌방어사(京畿江原兩道左防禦使)로 우방어사 이성부(李聖符)와 함께 적군을 예성강 상류의 마탄(馬灘)에서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니 크게 슬퍼하며 사직하였다. 후에 다시 군기시정(軍器寺正)·동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질이 강직하고 명분을 중히 여겨 권문세가에 몸을 굽히지 않았으며, 박순(朴淳)·유성룡(柳成龍) 등이 만나기를 청하였지만 그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았다. 만년에는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정작(鄭碏)·김상헌(金尙憲)과 친교를 맺었다. 1630년 81세로 우로(優老 : 연로함을 경하함)의 특전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었다. 좌찬성에 증직되고, 청릉군(靑陵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송계유고≫가 있다. 5)오광생 호는 도사이며 고흥의 덕양서원에 배향되었다. 6)노주관(魯周觀) 호는 양촌이며, 고흥의 덕양서원에 배향되었다. 7)문약연(文躍淵) 호는 입재이며, 1774년(영조 50)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8)정소송 고흥의 덕양서원에 배향되었다. 9)정난파(鄭蘭坡) 고흥의 덕양서원에 배향되었다. 10)명중화(明重華) 고흥의 덕양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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