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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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재동서원(齋洞書院)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 16
   송 간(宋 侃) 송대립(宋大立) 송 심(宋 諶) 송순례(宋純禮) 송희립(宋希立) 송 건(宋 建) 김시습(金時習) 송상보(宋商輔) 송득운(宋得運) 송석융(宋碩隆) 송홍연(宋弘淵) 송진부(宋眞夫) 송명규(宋明圭) 송찬문(宋粲文) 송정규(宋廷奎)
   1785년(정조 9)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5호(1987.09.08지정)
재동서원은 여산송씨 충강공 송간(宋侃)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 송순례(宋純禮), 송희립(宋希立), 송건(宋建)과 김시습(金時習)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1785년(정조 9) 최초 건립 당시 여산 송씨 송간(宋侃),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과 고흥 유씨 유탁(柳濯), 영광 정씨 정연희 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1782년 태학유생 한덕보가 서재 송간을 주벽으로 하는 사우 건립을 발의한데서 비롯되어 흥양유생 신응택, 정효목 등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되었다. 10여년이 지난 1791년 건립당시 주역이였던 정효목 신응택의 주선으로 여산송씨, 고흥류씨, 영광정씨의 분사가 합의되었다. 1796년(정조 20) 서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재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다.
1801년(순조 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대하여 일문 육충사로 불리었다. 1833년(순조 33) 송상보, 송득운, 송석융을 추배하였고, 헌종 12년(1846) 매월당 김시습을 봉안하였다. 1848년에는 원유들의 개호상서에 의해 「서동사」로 개칭하였고, 1868년 전국 서원훼철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모양이나 이내 훼철되었다. 1956년 현 위치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 송진부를 추배하였다. 같은 경내의 창효사(1980년 건립)에는 효열을 분리하여 송석융, 송명규, 송찬문,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1)주벽-송간(宋侃, 1405~1480)
조선 전기의 충신.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서재(西齋). 할아버지는 고려 중랑장 인충(仁忠)이다. 세종·문종·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455년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려는데, 단종이 영월로 쫓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 상을 마치고, 흥양(興陽)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냈다. 10여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한다. 1793년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송대립(宋大立, 1550~ 1597)
1550(명종5)~1597(선조30) 〚조선〛 무장. 자는 신백(信伯), 본관은 여산(礪山), 형조 참판 간(侃)의 후손. 흥양(興陽) 출신. 경사(經史)에 밝고 무예(武藝)에 뛰어났다. 1594년(선조27) 임진왜란 중 무과(武科)에 급제, 당시 지도 만호(智島萬戶)로 있던 아우 희립(希立)과 함께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있다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밑으로 옮겼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권율에 의해서 창의 별장(倡義別將)이 되어 전공(戰功)을 세우고, 흥양에서 많은 의병(義兵)을 모집, 적을 무찔렸으나 복병(伏兵)을 만나 전사했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흥양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祭享).
 
3)송심(宋諶, 1590~163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사윤(士允). 아버지는 창의별장(倡義別將) 대립(大立)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아버지가 창의별장으로서 많은 의병을 모아 흥양(興陽)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하자 이를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다.
한때, 균전사 권진(權縉)이 호남의 민전(民田)을 감사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그의 용맹성을 보고 대성할 것을 예견하였다. 또한, 도사(都事) 김시강(金時講)이 유생들에게 강(講)을 하과(下課 : 왕이 講의 과제를 냄.)할 때 그는 자청하여 병서(兵書)를 훌륭하게 강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무과에 급제, 북변(北邊)의 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수군통제사 구굉(具宏)의 막료가 되어 그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고, 이어서 전라도병마우후(全羅道兵馬虞候)가 되었다.
1635년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휘하의 척후장(斥候將)으로 남한산성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양근(楊根)에 이르렀을 때 이미 강화가 성립되자, 중영(中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청군 소속의 몽고병을 추격, 안변남산역(安邊南山驛)에 이르러 전후영장(前後營將)과 함께 적을 공격, 부족한 병력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흥양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다.
 
4)송순례(宋純禮, 1528~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문백(文伯). 간(侃)의 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 16) 아산진(阿山鎭)을 지킬 때 여진인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이 해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물리쳐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악비(岳飛 : 중국 남송의 충신)의 <정충록 精忠錄>을 하사받고 이산군수가 되었다. 1588년 탐오하다 하여 군수직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뒤 다시 제주목사·전라도방어사 등을 지냈다.
흥양(興陽:지금의 高興)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5)송희립(宋希立, 1553~162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신중(信仲). 간(侃)의 6대손이며, 대립(大立)의 아우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군관(軍官)으로서 영남지역에의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지도만호(智島萬戶)가 되어 형 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적에게 포위된 명나라의 제독 진린(陳璘)을 구출하였으며, 1601년(선조 34) 양산군수·다대포첨절제사(多大浦僉節制使)를 지내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흥양(興陽 : 지금의 전라남도 高興)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다.

6)송건(宋建, 1558~1592)
자는 사립(士立), 현령(縣令) 하형(夏衡)의 아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북변의 군영에 보직되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 양사준(梁士俊)의 선봉으로 활약한 공으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이 되었다. 그 뒤 함창 싸움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흥양의 세충사에 제향되었다.

7)김시습(金時習, 1435~ 1493)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8)송상보(宋商輔, 1564~1597)
일명 상보(商甫)라고도 한다. 호(號)는 봉재(鳳齋)이다. 충강공 간(侃)의 후손으로 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행주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당진현감에 제수되었다. 거(居)고흥 남계.
 
9)송득운(宋得運, 1570~1633)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왜병을 물리치는 데 전공을 세워 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충사에 배향되었다.
 
10)송석융(宋碩隆, 1614~1733)
본관은 여산이며 송간의 8세손이다. 찰방으로 증직되었다.
 
11)송홍연(宋弘淵, 1569~1629)
여산 순양공(純襄公) 순례(純禮)의 장손으로 임진왜란때 전라병사로서 진주에서 큰 공을 세웠다. 병신년(1596)에는 전부장(前部將)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홍주에서 평정한 공으로 정란훈에 기록되었다. 인조대 충좌위(忠佐衛) 좌부장(左部將), 전부장(前部將), 남해현감, 내금장(內禁將), 온성판관(穩城判官), 개천군수(介川郡守), 위원군수(渭原郡守),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 무산첨사(茂山僉使), 창주첨사(昌州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후손으로 주한(柱漢)이 있다. 거(居)동강 매곡.
 
12)송진부(宋眞夫, 1569~1597)
조선 중기의 무신·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경개(景蓋). 호는 석계(石溪). 아버지는 군자감직장인 상장(尙長)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同福吳氏)로 찰방 익후(益厚)의 딸이다. 1589년 향시(鄕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의 모함을 입어 삭과(削科)되었다. 그 뒤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뒤 회령첨사(會寧僉使)를 지내고 경상병사가 되었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각지로 격문을 보내 의병 수만 명을 모은 뒤 부사를 지낸 나적(羅迪)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장성으로 진군하였다. 그 때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군량이 부족하므로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의곡(義穀) 800여 섬을 얻어 군량을 확보하고, 남원성으로 진격하여 적장 7인을 베고 전사하였다.그 뒤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저서로는 ≪석계결고≫ 4권이 있다.
 
13)송명규(宋明圭)
효자로 이름났으며, 고흥의 재동서원에 배향되었다.
 
14)송찬문(宋粲文)
1980년 고흥 재동서원의 창효사에 배향되었다.
 
15)송정규(宋廷奎, 1656∼17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경(元卿), 호는 우수(迂叟). 참판 일(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시길(時吉)이고, 아버지는 증(拯)이며, 어머니는 신득홍(申得洪)의 딸이다.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690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당시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처우문제에 대한 소를 올렸다.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1696년 경성판관으로 그 지역을 잘 다스려 품계가 오르고,뒤에 승지가 되어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하였다.
1701년에 인현왕후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08년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절수(折受 : 국가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땅이나 結稅를 받음.)의 폐를 상소하여 강릉·춘천·낭천 등 3읍의 절수를 폐지하게 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묘 대성전(大成殿 : 孔子의 位牌를 모신 전각)의 현판을 썼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서동사와 창효사가 있으며 강당인 경효재, 동·서재 및 내·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비각과 비석이 있다.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공간, 뒤에는 제향공간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강당인 경효재(敬孝齋)는 서원 경내의 동북쪽, 동.서재와 분리된 일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하여 별도로 낸 양호문(洋呼門)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내삼문을 통해 제향공간에 들어서면 서동사(西洞祠)와 창효사(彰孝祠)가 각각 동쪽과 남쪽에 ㄱ자형으로 서로 직교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건명 유허비가 비각에 들어있다.
고흥군청 홈페이지 http://www.goheung.go.kr/
사진-고흥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