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제월리 130 |
|
|
심 선(沈 璿) 심광형(沈光亨) 심민겸(沈敏謙) 심민각(沈敏覺) |
|
|
1799년(정조 23) |
|
|
|
|
|
음 3월16일 |
|
|
|
|
|
|
|
청송심씨(靑松沈氏)의 4현인 심선(沈璿), 심선의 증손인 심광형(沈光亨), 심광형의 손인 심민겸(沈敏謙), 심민겸의 종질인 심민각(沈敏覺)을 제향 하는 사우(祠宇)이다. 1784년(정조 8)에 옥과현 유생인 허권 등 53인이 이들을 제향하는 사우의 영건(營建)을 도모하는 통문을 내었고 이듬해 순창유학 양종세(楊宗世) 외 32인, 담양 나득회(羅得會)외 44인, 남원 유규운(柳奎運)외 44인, 전주 송익인(宋翼麟)외 56인, 나주 나벽천(羅壁天)외 30인, 광주 정윤길(鄭潤吉)외 84인들이 창건을 발기하고 통문을 내는 등의 노력 끝에 마침내 1799년(정조 23)에 사우가 건립되었으며 이로부터 네분께의 향사(享祀)가 시작 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훼철되었으며 1906(光武 10)년 사우가 있던 곳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보존되어 오다가, 1965년에 후손인 상연(相演), 상귀(相貴), 균택(均澤), 홍섭(洪燮)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는데 40여년 유지되다가 건물이 낡아 2006년 후손(청송심씨곡성종회 회장 심진식(沈鎭植))들의 노력하여 확장, 중건을 하였다. |
|
|
1)망세정 심 선(忘世亭 沈 璿). 서울출생(1408~1467) 자는 윤부(潤夫), 호는 망세정. 좌의정 심덕부(沈德符)의 증손으로 천성이 효우충신(孝友忠信)하고 재기(才器)가 발군(拔群)하여 6년간이나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학문이 넓고 크게 통달하였다. 세종 17년(1435) 진사시에 장원하고 재현(才賢)으로 천거되어 여러 고을의 군수를 거쳐 예조참의, 황해감사, 개성유수, 경기도관찰사 겸 집현전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양주 평양에 망세정(忘世亭)을 짓고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내면서 세조(世祖)가 여러 차례 벼슬자리에 불렀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의 높은 학덕(學德)과 절의(節義)를 추앙(推仰)하였으며 후에 보국숭록대부영돈령(輔國崇祿大夫領敦寧 : 正一品)에 추증(追贈)되었고 장릉(莊陵 : 端宗陵)의 조사단(朝士壇)에 제향(祭享)되었다. 2)제호정 심광형(霽湖亭 沈光亨) 전남곡성출생(1510~1550) 자는 문옹(文翁)이고 호(號)는 제호정(霽湖亭).(망세정 심선의 증손). 일찍이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깊이 경사(經史)에 깊이 통달(通達)하여 영호 남간의 많은 선비들과 교유(交遊)하였다. 당시 김정국(金正國) 도백(道伯)이 “효(孝)는 증자(曾子)를 이었으며 학문은 주자(朱子)의 정통을 준수하였고, 문장(文章)의 재능과 예법을 행함에 있어 도의를 바탕으로 자세를 확립하였으며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를 중히 여기는 풍토를 조성하고 일으켰다.”라고 나라에 천거하여 중종(中宗)께서 광양, 곡성, 남평, 순창 4읍의 중학훈도(中學訓導)로 특별 제수(除授)하였다. 만년에 강호(江湖)의 승경(勝景)을 좋아하여 제호(霽湖)에 함허정(涵虛亭)을 짓고 수양(수양)의 처소로 삼았는데, 이곳을 방문한 당시 도백(道伯)이 “ 명문의 자손으로 어찌 훈도에 그칠 것인가! ”하고 출사(出仕)할 것을 권하였으나 웃음으로 불응하였는데 이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3)두암 심민겸(杜菴 沈敏謙) 전남곡성출생(1570~1646) 자는 사윤(士允), 호는 두암(망세정 심선의 5대손).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되어 권율(權慄)장군을 도와 수원에 주둔하고 군량(軍糧) 공급에 힘썼으며, 행주접전(幸州接戰)에 참가하여 기공(奇功)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의병을 이끌고 역전(力戰)하는 한편 남원성을 수축(修築)하여 적(敵)에 대비하기도 했으며, 선조(宣祖) 31년(1598) 순천 왜교전(倭橋戰)에서도 병량공급(兵糧供給)에 주력(注力)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전후(戰後)에는 주부(主簿)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인조(仁祖) 2년(1624)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병속(兵粟)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였으며 다시 인조 5년(1927) 정묘호란(丁卯胡亂)때에는 세자(世子)를 호종(扈從)하였으며, 인조 14년(1936)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도 의곡(義穀)을 모집하여 강화(江華)에 수송하는 등 국란(國亂)이 있을 때마다 부의(赴義)하여 많은 공(功)을 세웠는데 나주(羅州) 충장사(忠壯祠)에도 제향(祭享)되었다. 4)구암 심민각(龜巖 沈敏覺) 전남곡성출생(1589~1643) 자는 숙선(叔先), 호는 구암(龜巖),(망세정 심선의 6대손). 어려서부터 인격이 출중하였고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문장(文章)과 무술(武術)을 겸비하고 강개(慷慨)한 기질로 풍채(風彩)가 영매(英邁)하였다. 인조(仁祖) 2년(1624) 이괄(李适)의 난(亂)에 의병(義兵)과 가동(家僮) 9백여명을 이끌고 창기(倡起)하여 운봉현감 황일호(黃一皓)와 함께 왕(王)을 공주에서 호종(扈從)하고 안현(鞍峴)싸움에서 승전을 거두니 왕이 그 공(功)을 포상(褒賞)하여 청안현감(淸安縣監)과 증산현감(甑山縣監)을 제수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호서지방(湖西地方)을 지키면서 강화도에 물자를 공급했으며, 상소하여 화친(和親)을 반대하였다. 난후(亂後) 영유현령(永柔縣令)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강가 구암(龜巖)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유명(遺命)으로 병자(丙子) 후의 관직을 쓰지 못하도록 가족에게 당부하였다. |
|
|
사우(祠宇)인 구암사(龜巖祠)와, 내삼문, 강당,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
|
|
|
|
|
참고-전라남도교육연구원,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