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양서원(德陽書院)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6-1
   신숭겸(申崇謙)
   1589년(선조 22)
   1695년(숙종 21)
   음력 2월, 8월 중정
   전라남도기념물 제56호(1984.02.29지정)
덕양서원은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장군을 독향한 서원이다. 곡성 출신인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1589년(선조 22)에 곡성현감으로 와있던 후손 신옥(申沃)이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그리고 곡성관내 후손들과 합의하여 이 서원을 창건하였다. 서원경내에서는 준수한 선비들을 모아 수업하도록 하였고, 그 지방의 특유한 풍속을 장려하며, 선현의 충절을 일깨우는 등 교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에 의해 모든 건물이 불타고 다만 공의 사우와 위패만이 보존되어 오던 중 1602년(선조 35) 한준겸(韓浚謙)이 전라도 관찰사로 와서 장절공의 영령이 금시(禁呞)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서원을 순찰하기에 이르렀다. 소실된 사우는 한준겸 관찰사의 주선으로 다음해인 1603년(선조 36)에 신실이 중수되었다.
그 뒤 다시 1665년(현종 6)에는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던 서원의 규모를 모두 갖추어 중건하였다. 그 후에도 1673년(현종14), 1678년(숙종 4) 신완(申琓) 등 후손들에 의해 중수가 있었고, 1695년(숙종 21) 곡성유생 조유수(趙有遂) 등이 공의 사우를 세운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공의 충절이 세상 사람들 눈과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마땅히 사액이 내려져야 한다는 청액소를 작성하여 상소하였다. 이에 우승지로 있던 윤세기가 조정에 상소하여 동년 5월 사액이 내려지고 예관으로 공조정랑 최휴를 보내어 치제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821년(순조 21)세워진 「덕양서원건사사적비」와 강당내부에 있는 10매(枚)의 현판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덕양서원은 1897년 후손인 신명희가 장절공의 태생지인 곡성군 본사동면 구룡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1929년에는 사론으로 설단배향하였으며 1960년에 용산재와 구룡문을 창건했다. 한편 1934년에는 전라도에 거주하는 후손들의 발의로 덕양서원을 중건하였으며 1968년과 1979년에 각각 중수하였고, 1981년에 용산재와 함께 전라도지방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1)주벽-신숭겸(申崇謙, ?∼927)
고려 전기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며,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을 보면,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위치는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의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뒤편으로는 중첩된 산들이 서원을 감싸고 있으며 전면으로는 시야가 트이면서 멀리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서원의 존체 좌향은 정좌개향이며, 건물구성은 사당, 강당, 동재, 서재, 전사청, 재삼문, 외삼문, 비각, 관리사 등 총 9동으로 구성된 비교적 큰 규모의 서원이다.
서원의 배치모습은 전학후묘의 형태로 서원 경내는 크게 2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맨 이쪽으로는 외삼문을 좌우로 별도의 방형 담장내에 제향구역이 형성되며 이와 약 2m의 지반을 둔 아래쪽으로는 강학구역이 펼쳐진다. 이 구역이 다시 2로 분리되어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위치 및 배열들이 매우 자유스러운 배치형태로 되어있다. 우선 강당이 사당과 외삼문이 이루는 중심상에서 약 5.5m정도 좌측으로 옮겨져 있으며 동·서재의 배치도 대칭이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 서원건축에서는 강당 전면에 정대칭으로 동·서재가 자리하는 것이 강학구역내의 배치규범이다. 또한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우측에 관리사가 들어서 있는데 이 또한 서원건축의 어긋난 배치형태이다. 본 서원은 전체적으로 규모는 크나 건물배치에 있어서는 다소 불합리한 양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현재 서원 경내의 동·서재 앞으로는 원형으로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서재 위쪽으로는 방형의 연못이 축조되어 있는 등 비교적 경내의 조경이 잘 되어있다.
1)덕양서원건사사적비
신녕(申檸)이 비문을 짓고 신정희가 쓴 것으로 1821년에 세워졌다.
 
2)중수사업기념비(1968), 중수기적비(1976)
참고-목포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