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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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산서원(雲山書院)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406
   문익점(文益漸)
   1722년(경종2)
   
   3월 중정
   
1722년(경종2) 창평현 금구동에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5)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1933년 현 위치인 대전면 갑향리에 재건하였다. 1972년 재축하였으며, 현재는 남평 문씨에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1799년(정조23)에 주벽으로 문익점(文益漸)을 배향하였다. 2002년 일가들의 성금으로 현재의 자리인 마을입구에 옮겨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1)주벽-문익점(文益漸, 1329~1398)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숙선(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있으며,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2)문래(文萊)
자(字)는 자봉(子蓬), 호(號)는 이곡(理谷), 시호(諡號)는 정혜(靖惠), 경사(經史)에 통(通)하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산수(算數)·척도(尺度) 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1395년(태조 4)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가 치사(致仕),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大夫)·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3)문빈(文彬, ?∼1413)
1400(정종2년) 대장군(大將軍)으로 재직할 때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이방원(李芳遠 : 후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지낸 후 1409년 풍해도첨절제사(豊海道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운산서원에 배향되어 3월 중정일에 제사를 모신다.

4)문완(文琓)
자는 형옥(亨玉), 호는 경암(敬菴)이며 시호는 익정(翊定)이다. 관직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5)문완(文完)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강당과 동제나 서제 등의 건물이 없어 서원의 구조로는 부족함도 있다. 삼문을 지나면 사우인데 운산사(雲山祠)란 현판이 있다.
운산사 입구에는 문씨오선생 실적비가 있다.

참고-남평문씨 충선공파종회 http://www.ikjum.com/.
신종우의 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