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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월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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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심언(金審言) 김 해(金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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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영조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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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월 중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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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서원은 1784년(영조 24) 본향유림의 발론으로 김심언(金審言), 김해(金該)) 두 분의 충절을 사모하여 처음 영광읍 동부면 내천에 사우를 창건하고 기천사(岐川祠)라 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3년(광무 7) 설단향사(設壇享祀)해 오던 중 1933년 현재의 위치에 사우를 복건하였다. 1975년에 영광향교 전교 강길원(姜吉遠) 등 10여 인이 기천사(岐川祠)를 무영서원(武靈書院)으로 개칭하였다.그 후 다시 본 서원은 정부당국의 보조로 1975년 개수를 하여 새로 단장을 마친 바 있다. 향사일은 매년 3월, 9월 중정일에 향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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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김심언(金審言, ?∼1018) 고려 초기의 문신. 정주(靜州) 영광현(靈光縣) 사람 처음에 상시(常侍) 최섬(崔暹)에게 배웠으며, 그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보궐 겸 기거주(右補闕兼起居注)가 되었다. 990년(성종 9)에 봉사(封事:임금에게 보내는 상소문)를 올려 성종의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의 봉사는, 성종 때 본격화되는 유교적 정치이념의 구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봉사를 보면 첫째는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자사육조(刺史六條)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서경(西京)에 사헌(司憲) 한 사람을 분견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육정육사의 글은 중국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찬한 ≪설원 說苑≫의 육정육사의 글을 참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대체로 인신(人臣)의 행실에는 육정과 육사가 있는데, 육정을 행하면 번영하고 육사를 범하면 욕이 된다. 육정의 첫째는 성신(聖臣)으로 어떤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홀로 환하게 앞을 내다보고 사전에 군주에게 간하여 잘못된 정치를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사람, 둘째는 양신(良臣)으로 군주를 예의로써 권면하고 좋은 계책으로써 보필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또 셋째는 충신으로 현인(賢人) 천거에 힘쓰고 자주 고사(故事)를 들어 군주의 뜻을 면려(勉勵)할 수 있는 사람, 넷째는 지신(智臣)으로 밝게 성패(成敗)를 살펴 구제하고 화를 돌려 복을 만들어 군주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 다섯째는 정신(貞臣)으로 법대로 행동하고 일을 분담하며 절검(節儉)할 수 있는 사람, 여섯째는 직신(直臣)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군주의 잘못을 면전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육사의 첫째는 구신(具臣)으로 관(官)에 안거(安居)하여 녹(祿)을 탐하고 공사(公事)에 힘쓰지 않고 관망하는 신하, 둘째는 유신(諛臣)으로 군주가 말하는 것은 다 옳다 하고 군주가 하는 것은 다 좋다 하며 아첨만을 일삼는 신하, 셋째는 간신으로 마음이 음흉하여 선인(善人)을 시기하고 현인을 미워하며 군주의 정사를 흐리게 하는 신하라 하였다. 또 넷째는 참신(讒臣)으로 간사한 꾀로써 안으로는 골육 사이를 이간시키고 밖으로는 혼란을 야기시켜 조정에 큰 피해를 주는 신하,다섯째는 적신(賊臣)으로 권세만을 생각하여 함부로 왕명을 꾸며서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신하, 여섯째는 망국의 신으로 군주를 불의에 빠지게 하고 군주의 악함을 국내외에 드러나게 하여 나라를 망치는 신하라 하였다. 또, 자사육조는 ≪한서 漢書≫에 있는 것으로서 자사가 해야 할 일을 열거하고 있다. 즉, 첫째는 서민의 질고(疾苦)와 실직한 자를 살피는 것, 둘째는 묵수장리(墨綬長吏) 이상의 관정(官政)에 거(居)하는 자를 살피는 것, 셋째는 백성들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와 간교한 자를 살피는 것, 넷째는 전범률(田犯律)과 사시금(四時禁)을 살피는 것이다. 또 다섯째는 백성이 효제(孝悌)하고 염결(廉潔)하며 행수(行修)가 바르고 재주의 특이한 것을 살피는 것, 여섯째는 관리가 전곡(錢穀)을 장부에 기입하지 아니하고 짐짓 흩어버리는 것을 살피는 것이니, 위에 말한 육정육사의 글과 자사육조를 담당관청에 맡겨서 개경과 서경의 모든 관아 및 지방 각 관청의 당벽(堂壁)에 각각 그 글을 써붙여 출입할 때마다 보게 하여 귀감으로 삼게 하자고 성종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이어 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나라가 동도(東都)에 지대어사(知臺御史)를 두던 예에 의거하여 사헌1원(員)을 분견하여 서경 관내 관리들의 잘잘못을 살피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성종은 그의 건의를 가상하게 생각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목종 때에 지방관으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현종 초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예부상서가 되었다. 1014년 (현종 5)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승진, 서경유수가 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2))김해(金該, ?~1419)
김해는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 갑산(甲山)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서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 1360~1425)의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참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인물이었다.
세종조(世宗朝)에 대마도(對馬島)를 토대(討代)할 때 갑산(甲山)군사(郡事)로 보공장군대호군(保功將軍大護軍)에 임명되어 전사(戰死)하니 조정에서는 예관(禮官) 박융치(朴融致)를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그 만사(輓詞)는 다음과 같다.
도이침릉퇴사영(島夷侵凌罪斯盈),
혁노흥사욕곽청(赫怒興師欲廓淸).
저장용병개이률(저將用兵皆以律).
아경분전독연생(我卿奔殿獨捐生).
조정진도은가수(朝廷震悼恩加數),
여이비호곡실성(閭里悲呼哭失聲).
성대지금다무사(聖代至今多武士),
수능일주경동정(誰能一酒更東征)
(도이가 침노하여 죄(罪)가 이에 가득함에 발끈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완전히 소탕하려 하여 저장이 용병(用兵)을 다 법(法)대로 했으나, 아경(我卿)이 적(賊)하여 뒤쳐져 오다가 홀로 생(生)을 버림에 조정(朝廷)에서는 애도(哀悼)하여 이수(異水)의 은전(恩典)을 더해주고, 여이(閭里)에서는 슬피 호곡(號哭)하여 실성(失聲)했도다. 성대(聖代) 지금(至今)에 무사(武士)가 많으니. 누가 능(能)히 한번 치욕(恥辱)을 씻어 다시 동정(東征)할거나)」.(영광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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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의 건물배치는 신실(神室)인 기천사(岐川祠)가 정면 3칸, 측면 1 ‧ 5칸의 맞배지붕으로 맨 안쪽에 위치하고, 내삼문인 태충문(台忠門)이 있으며, 그 앞에 무영서원(武靈書院)이라 새겨진 편액이 걸려있는 강당(정면 4칸, 측면 3칸, 팔각지붕)이 있다. 강당 앞에는 외삼문인 숭의문(崇義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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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안에는 ①「경모재중건기(景慕齋重建記)」(1960년, 강대기(姜大基) 기(記)), ②「경모재원운(景慕齋原韻)」(1960년, 김석용(金錫龍) 기(記)), ③「경모재원운(景慕齋原韻)」(김봉호(金鳳浩) 기(記))등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내삼문 옆에 ①「무령서원비(武靈書院碑)」(1975년, 신호열(辛鎬烈) 찬(撰), 이학용(李學傭) 서(書), 고(高) 205cm, 폭(幅) 58cm, 후(厚) 30cm), ②「기천사본손성조록(岐川祠本孫誠助錄)」(1975년, 고(高) 117cm, 폭(幅) 39cm, 후(厚) 16cm ③「무령서원중건기념비(武靈書院重建記念碑)」(1986년, 고(高) 193cm, 폭(幅) 55cm, 후(厚) 20cm), ④「삼봉김공한룡기공비(三峯金公漢龍紀功碑)」, ⑤「양천김공윤택기공비(陽泉金公潤澤紀功碑)」, ⑥「안풍김공기공비(安豊金公紀功碑)」, ⑦「구봉김공기공비(丘鳳金公紀功碑)」, ⑧「백봉김공기공비(白鳳金公紀公碑)」, ⑨「기천사유허비(岐泉祠遺墟碑)」(기우만(奇宇萬) 찬(撰))등 9기(基)의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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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영광군지, 남도코리아 http://www.namdokorea.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네이버블로그 ‘남도이야기’ http://blog.naver.com/hbbss/80014357159 <향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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