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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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묘장서원(畝長書院)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영당마을
   이천우(李天祐) 이복원(李馥遠) 이 굉(李 宏) 이명인(李明仁) 이응종(李應鍾) 이황종(李黃鍾) 이홍종(李洪鍾) 이 근(李 根)
   1616년(광해군 8)
   
   
   묘장영당-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49호(2004.02.13지정) 이천우영정 및 이응도·공신회맹축 목판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46호(1987.06.01지정)
묘장서원은 1616년(광해군 8)년 이천우(李天祐)의 유덕을 추모하여 태종이 하사한 공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서 현 소재지에 처음 영당사(影堂祠)를 창건하고 제향해 오다가 철종 때 이복원(李馥遠)을 추배하였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순종 후 1928년 구지(舊址)에 사우를 중수하고 이굉(李宏), 이명인(李明仁), 이응종(李應鍾), 이황종(李黃鍾), 이홍종(李洪鍾), 이근(李根) 등을 향사하여 묘장서원이라 개액(改額)하였다. 향사는 매년 2월 8월 중정일에 행사한다.

1)주벽-이천우(李天祐, 1354~1417)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백형 원계(元桂)이며, 양우(良祐)의 아우이고, 조(朝)와 백온(伯溫:曙)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그릇이 컸다 한다.
1369년(공민왕 18)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해 공을 세우고, 1393(태조2)년 8월에 강천수(姜天守) 등 595인과 더불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1394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1396년 강원도조전절제사(江原道助戰節制使)가 되어 왜구 방비에 노력하였다. 1398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 해 정도전난(鄭道傳亂)이 일어나자 방원(芳遠)을 도와, 형 양우와 더불어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봉되고 150결의 공신전을 받았으며,완산후(完山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판중추원사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으면서 소위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역시 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이 되고 100결의 공신전을 받았다. 1402년(태종 2) 안주도절제사를 지내고, 다음 해 완산군(完山君)에 개봉되었다. 1404년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지내고, 1407년에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의정부찬성사에 오르고, 1409년 병조판서로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신설되자 도진무도총제(都鎭撫都摠制)를 겸하였다. 1410년 판의흥부사에 이어 다시 찬성사가 되고,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했으며, 1413년 이조판서를 거쳐 서북면도체찰사로 나갔다. 1414년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진봉되고, 의금부도제조를 지낸 뒤 다시 찬성사에 보직되었다.
사후에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전라도 영광의 묘장영당(畝長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양도(襄度)이다.
 
2)이복원(李馥遠)
호(號)는 신봉(新峯)이며 전주인(全州人)이고 孝子相虎孫 以學行으로 參奉에 除受되었다.
 
3)이굉(李宏)
본관은 전주이며, 영광의 묘장서원에 배향되었다.
4)이명인(李明仁, 생몰년미상)
대군의 증손(曾孫)이며, 여양군의 장남(長男)으로 한양(漢陽)에서 출생(出生)하였다.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를 거쳐 1428년(세종 10) 부사정(副司正)이 되었으나 권귀(權貴)의 길을 싫어하여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김씨를 모시고 전남(全南) 담양(潭陽)으로 내려가 사미정(四美亭)을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는데 검소한 태도와 효도(孝道)가 극진하여 부민(府民)의 우러름이 있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공의 행실(行實)을 칭찬(稱讚)하여 전토(田土)를 하사(下賜)하였다. 사미정을 읊은 시가 <하서집(河西集)>에 나온다.
1872년(고종 9)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월성군(月城君) 겸 종정경에 추봉(追封)되었다. 묘소(墓所)는 전남 담양군 월산면 홍암리 능동에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묘장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5)이응종(李應鍾, 1522∼1605)
자(字)는 화숙(和叔), 호(號)는 사매당(四梅堂). 대군의 8대손이며 완산부원군의 7대 종손(宗孫)이다.
귤정(橘亭) 윤구(尹衢)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였고 1558년(명종 13) 생원(生員)으로서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붕당의 조짐을 보고 귀향(歸鄕)하였다. 예학(禮學)을 연구(硏究)하여 <가례부주(家禮附註)>를 저술(著述)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71세의 고령으로 장성(長城) 남문(南門) 창의(倡義)에 동생 홍종(洪鍾)과 아들 극부(克扶)·극양(克揚)을 데리고 수창(首倡)으로 참여(參與)하였다. 이 때 호남(湖南) 의병 3천여 명을 출전(出戰)시키며 수천 섬의 군량미(軍糧米)와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조달하여 광주 의진(義陣)과 의주(義州) 행재소에 보내는 데 진력(盡力)하였다. 한편 그 때 영광군수(靈光郡守) 남궁현(南宮俔)이 상을 당해 공석 중이라 정희맹 등 48인이 오성관에 모여 공을 영광성 수성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당산에 있다. 오산 창의사, 양도공 사우(祠宇)에 배향(配享)되고 공적비로 오산사 격문비, 영광수성비, 독립기념관에 창의(倡義) 격문(檄文) 등이 있다.
 
6)이황종(李黃鍾)
자(字)는 중초(仲初), 호(號)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전주(全州)니 영광(靈光)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중종(中宗) 29년에 나서 명종 19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추천으로 소촌찰방(召村察訪)이 되니 최수우(崔守愚)와 상거(相距)가 불원(不遠)하므로 교의(交義)가 두터웠다.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옥중(獄中)에서 죽으니 나이 57이었다. 선조 35년에 아들 극해(克楷)가 소원(訴寃)하여 복관(復官)하고 극해(克楷)는 재랑(齋郞)으로 임명되었다.(기추록)
 
7)이홍종(李洪鍾)
자(字)는 계명(季鳴), 호는 한천(寒泉), 본관은 전주(全州), 양도공(襄度公) 천우(天祐)의 후손, 사매당(四梅堂) 응종(應鍾)의 아우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효행이 있어 3년을 여묘(廬墓)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군량을 모집하여 의주(義州)의 행재(行在)에 보내고 형(兄) 응종(應鍾), 김재민(金齋敏) 등과 함께 장성(長城) 남문(南門) 밖에 의병도청(義兵都廳)을 창설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晋州)에 보내고 동지(同志) 54인과 함께 군성(郡城)을 지켰다. 뒤에 황산찰방(黃山察訪)을 지내고 귀향(歸鄕)하여 호를 지지당(止止堂)이라 하였다.(흥지도서. 호남절의록)
 
8)이근(李根)
자(字)는 양원(陽元), 호(號)는 우봉(牛峰), 본관은 전주(全州), 양도공(襄度公) 천우(天祐)의 후손이다. 선조(宣祖)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김오천(金鰲川) 경수(景壽), 윤률정(尹栗亭) 진(軫)과 함께 산졸(散卒)을 모아 직산(稷山) 소사(素沙)의 적(賊)을 유격(遊擊)하고 또 진주(晋州)에 들어가 싸우다가 미치지 못하여 성(城)이 함락되니 이를 한(恨)으로 여겼다. 사과(司果)로 임명되고 영조(英祖) 때 장락원판결사(掌樂院判決事)에 증직되었다.

현재 묘정영당은 사당(사우), 강당, 외삼문(문간채), 내삼문, 고직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간 경사진 지형을 2단으로 정지하여 첫째 단에 5칸 외삼문과 강당을, 둘째 단에는 내삼문과 사당을 배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영당사(影堂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이천우영정 및 이응도·공신회맹축 목판(李天祐影幀 및 二鷹圖·功臣會盟軸 木板)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46호(1987.06.01지정)
 
규모 : 가로 103.5cm 세로 160cm (영정), 가로 41cm 세로 86cm (이응도목판)
시대 : 1774년(영조 50년), 1747년(영조23년), 1791년(정조 15)

조선 초기 공신인 이천우의 영정과 1416년 태종이 하사한 어사이응도(御賜二鷹圖)의 목판(1747년 판각)이 지정되었으나 「전남의 목판」 일괄조사 실시로 조사된 공신회맹축 3판을 추가하여 지정함. 「공신회맹축(功臣會盟軸)」은 태종 4년(1404)에 국왕이 개국정사좌명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과 더불어 종묘에 나가 피로써 충성의 회맹을 서약하고 이를 문건으로 작성하여 각 공신에게 하사하였던 것으로, 참여하였던 인물로는 종친 의안대군(義安大君), 영안군(寧安君), 봉령군(奉寧君), 완천군(完川君)이 보이고 있으며, 공신으로는 김사형(金士衡)을 비롯하여 하륜(河崙), 성석린(成石鱗), 조준(趙浚), 이서(李舒), 이무(李茂), 조영무(趙英茂), 오사충(吳思忠), 이천우(李天祐) 등 모두 63인의 공신명단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음.
「어사이응도」와 「공신회맹축」을 하사 받은지 388년이 지난 정조 15년(1791)에 이르러 축(軸)이 퇴락하여 이를 영구히 보존할 방안으로 목판에 판각되었음. 판각 후에 이를 여러부 찍어 후손에게 광포(廣布)하여 선조의 공훈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
제1판은 종묘에 나가서 고한 기로문(祈告文)이 수록되어 있으며, 판의 크기는 가로 43.5cm에 세로 121cm이다. 판두(板頭)에 ‘국왕신이방원(國王臣李芳遠)’이 새겨져 있고, 그 밑으로는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이 판각되어 있다.
제2판은 이 회맹에 참여하였던 4인의 종친과 63인의 공신명이 새겨져 있으며, 판의 크기는 가로 30cm에 세로 121cm이다. 제3판은 정조(正祖) 15년(1791)에 판각케 되었던 내력을 밝힌 이천우의 후손인 이이석(李以錫)의 발문이 판각되어 있으며, 판의 크기는 가로 22.5cm이며, 세로는 32.5cm이다. 이천우 영정과 이응도목판, 그리고 공신회맹축은 동일인과 관련유물이며 목판으로서는 비교적 연대가 오래된 점 등으로 보아 공신회맹축을 추가로 지정함.

참고-영광군지,
두산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영광군 홈페이지 http://www.yeonggwang.jeonnam.kr
 
사진-다음카페 학습 http://kids.daum.net/photo/do/major/imageView?majorId=2080122b2521365&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