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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대민공 (戴慜公) 강석덕 (姜碩德)(1395-1460) 강석덕(1395(태조 4)~1460(세조 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 (玩易齋), 조선 태종 때 동북면도 순문사를 역임한 회백(淮伯)의 아들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희맹(希孟)의 아버지이다. 문절공 이행(李行)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고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이던1416년(태종 16)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고, 이어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으로 있었는데 1439(세종 21)년에 사헌부 집의가 되어 내직으로 들어왔다. 이듬해에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고 1441(세종 23)년 동부승지와 우부승지가 되고, 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거쳐 1444(세종 26)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 왕후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뒤에 이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447(세종 29) 개성부유수로 나갔다가 1449(세종 31)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년(문종 즉위년)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 부사,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서화(書畵)를 즐기고 시(詩)와 문장(文章)을 잘하고 재물(財物)을 탐하지 않는 지조가 높은 청백리였다.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 세조는 처(妻) 심씨(沈氏) 상(喪)에 부의(賻儀)로 쌀, 콩 아울러 40석과 석회(石灰) 40석 유둔(油芚) 3部와 그리고 딸이 해산시 쌀 50석을 내려주었다. 저서로 <완역재집>이 있고 시호는 대민(戴慜)이다. 2) 동벽-인재공(仁齋公) 강희안(姜希顔) (1418~1465) 강희안 1418년(태종 18)~1465년(세조10)은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대민공 석덕(碩德)의 아들이며, 좌찬성 희맹(希孟)의 형으로 세종의 이질(姨姪)이다. 1438(세종 2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세종 23)년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돈녕부 주부가 되었다. 1443년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4(세종 26)년에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였고, 1445(세종 27)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같은 해에 집현전직제학 최항,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하자 부지돈녕(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단종 2)년에 집현전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 단종 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심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다.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 이종검(李宗儉)이 그의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60(세조 5)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1462(세조 7)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表), 전(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3년에 중추원 부사 (中樞院 副使)가 되었다. 1464(세조9)년에 사망하였는데 세조가 관곽(棺槨)을 부의(賻儀)로 내려주었다. 그는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으며, 특히 전서(篆書), 예서(隷書)와 팔분(八分)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는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문집이 없다. 그의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 곽희(郭熙), 글씨는 진(晋) 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元) 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기록상에 전하는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으며 영모화(翎毛畵) 산수화, 인물화에도 모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 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1454(단종 2)년에 산천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팔도(八道)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데 참여하였다. 1445년 명나라에서 보내온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여덟자 옥새를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추천하여 쓰게 하였다. 세조때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 그가 글씨를 썼으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다. 그는 글씨 쓰기를 꺼려 그의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러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한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여기에는 꽃을 가꾸는 일을 그의 경륜(經綸)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의 그림으로는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와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가 남아있다. 3)서벽-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 (1424~1483) 강희맹은 1424년(세종 6)~1483년(성종 14) 조선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국오(菊塢), 만송강(萬松岡) 대민공 석덕(戴慜公 碩德) 아들로, 희안(希顔)의 동생이며 세종의 이질(姨姪) 이다. 1441(세종 2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세종2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 주부가 되었다. 1450(세종 32)년에 예조좌랑과 돈녕판관을 역임하고, 1453(단종 1)년에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세조 1)년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1463(세조 9)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 부윤으로써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 합격하고 1466(세조 12)년 발영시에 3등, 등준시에 2등으로 급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68(예종 즉위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471(성종 2)년에는 좌리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그 해에 지춘추관사로써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3(성종 4)년에는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돈녕부사, 우찬성을 역임한 뒤 1482(성종 13)년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맡을 일은 잘 처리해냈으며 또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그의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의 실상이 잘 묘사되었는데 그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를 편찬하였으며 세조때 <신찬국조보감>,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서례>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과 그의 아버지인 강지돈녕(姜知敦寧)의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4) 동벽 - 숙헌공(肅憲公) 강귀손(姜龜孫) (1450~1505) 강귀손 1450년(세종 32)~1505년(연산 11)은 조선전기의 문신, 자는 용휴(用休)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이다. 1468(세조 1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군기시주부에 제수되어 여러번 옮겨서 돈명부 첨정에 이르렀다. 1479(성종 10)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482(성종 13)년 사헌부집의, 1487(성종 18) 사복시정, 1492(성종 23)년 장예원판결사, 1493(성종24)년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로 옮겼으며 여러번 승직 하여 1496(연산 2)년 도승지에 이르렀다. 1497(연산3)년에 외직으로 나가 경기관찰사가 되었다가, 1498(연산 4)년에 병조참판으로 옮기고 동년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사옥(史獄)에 참국(參鞫)하여 형조판서로 초승(超陞)되고, 1499(연산 5)년 한성부판윤으로 갔다가 이듬해 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1502(연산 8)년 진원군(晋原君)에 봉하고 지경연사를 거쳐 1503년 병조판서겸 판의금부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1504(연산10)년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이 되고, 1505(연산 11)년에 우의정으로 승배되어 하등극사(賀登極使)로 새 황재의 등극을 축하하러 연경으로 가다가 도중에 등창이 나서 죽으니 나이 56세이다. 숙헌(肅憲)이라 시호하니 마음을 바로 지켜 결단함이 숙(肅)이요, 널리 듣고 재능이 많음이 헌(憲)이다. 성품이 억세고 재간이 있어 직무에 임하면 엄밀했으며 일에 따라 잘 처리하며 하는 일은 남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으며 친척과 친구를 후하게 대우하여 곤궁과 영달로써 달리하지 않았다. 만년에 작은 정자를 지어 장륙(藏六)이라 편액하고 뜻을 비추었다. 왕이 황패가 날로 심해지매 끝내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폐립(廢立)하려고 신수근의 뜻을 알아볼 꾀를 썼으나 뜻이 맞지 않으매 모사가 누설될까 근심하더니 드디어 등창이 나서 죽었다. 5) 서벽 - 사평공(司評公) 강학손(姜鶴孫) (1455~1523) 조선전기의 문신, 자는 문보(聞甫)이고, 호는 팔용정(八龍亭), 본관은 진주이며 좌찬성 강희맹의 아들이고 우의정 강귀손의 아우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480(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성종 17)년 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에 임명되고 1487(성종 18)년 내섬시(內贍寺) 주부를 거쳐 1489(성종 20)년 사온서(司醞署) 주부가 되었다. 1491(성종 22)년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어 조정의 언로를 바르게 하였으며 1492(성종 23)년 장례원 사평이 되어 복잡한 정사를 정확히 처리하였다. 이듬해 평양판관으로 전식되어 목민관으로 정성을 다하였는데 만기가 되어 1498(연산4)년 한성부서윤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파직되어 영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504(연산 10)년 갑자사옥에 영광에서 잡혀가 국문을 하였으나 굽히지 않으니 김굉필, 이계맹 등이 강학손을 절개가 있어 고문으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화를 면하고 다시 영광에 귀양 보냈다. 1506(중종 1)년 중종반정으로 국가의 위난을 평정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문치(文治)에 전념할 것으로 옛날 귀양 보냈던 신하를 사면하고, 1515(중종 10)년 조정의 공론으로 공을 한성판윤으로 임명 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다. 영광 구수도당산하(九峀圖堂山下) 팔용촌(八龍村)에 정자를 지어 팔용정이라 편액하고 같이 귀양살이 하던 참판 김훤(金暄), 부윤 이천기(李天寄), 좌랑 조수(曺壽)와 동군진사 이효상(李孝常)과 더불어 경전과 예법을 토론하고 후진을 가르쳐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외손이다. 만년에 현 군서면 남죽리 615번지 안터마을에 집을 짓고 집 앞에 제방을 쌓아 못을 만들고 종산의 물을 받아 연을 심어 관상하는 한편 농업용수로 사용하니 농사짓기에 편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는 가솔이 백여 호에 이르렀다 한다. 제방 앞에 개천이 있어 돌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니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곳에 전하는 땅 이름이 사평공의 별호로 앞들은 사평들, 연못을 사평방죽, 다리는 사평다리라 하였다. 69세에 돌아가시니 학정리 이흥산(驪興山)의 묘좌(卯坐)에 장례하고 뒤에 이흥재와 사우를 짓고 향사하여 오던 중 이흥서원으로 개칭 사(四)현을 추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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