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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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녹동서원(鹿洞書院)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356
   최덕지(崔德之) 최충성(崔忠成) 김수항(金壽恒) 김창협(金昌協)
   1630(인조 8)
   1713년(숙종 39)
   4월 5일
   최덕지 영정과 유치초본-보물 제594호(1975.05.16지정) 녹동서원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3호(1992.11.30지정)
최덕지(崔德之) 등을 배향하기 위해 1630(인조 8)에 건립되었다. 본래 ‘存養祠’라는 이름으로 1630년(인조 8)에 창건되어1713년(숙종 39)에 ‘녹동’이란 사액을 받았다. 창건 당시에는 최덕지만을 봉안한 사우였으나 1665년(현종 7)에 최덕지의 손자인 최충성(崔忠成)을 배향하고, 뒤이어 김수항(金壽恒)을 추배하였으며, 그 뒤 1711년(숙종 37)에 김수항 아들인 김창협(金昌協)을 추배하여 현재 4위를 봉안하고 있다. 녹동서원이 건립하게 된 연원은 최덕지가 당시 권세를 잡은 간신배들의 작폐가 너무 심하자 노령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와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형제봉 아래에 은거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이곳에 ‘존양루’를 건립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으로 존양루가 병화로 소실되자 1630년(인조 8) 향인들이 최덕지를 추모하는 뜻에서 사우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당시 영암군수 이선행의 협조를 받아 월출산 남쪽 기슭에 ‘존양사우’를 건립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헐렸다가 1977년 옛터에 복설하였다.

1)주벽-최덕지(崔德之, 1384∼145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용봉(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인(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담(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환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 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2)최충성(崔忠成, 1458∼1491)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필경(弼卿). 호는 산당서객(山堂書客). 광주(光州)에서 출생했다. 최덕지(崔德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용(司勇) 별(潎)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 되어 ≪소학≫을 배웠으며 뒤에 정여창(鄭汝昌)의 제자가 되었다.
≪소학≫을 실천수행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문집 속에 <독소학문 讀小學文>·<독소학입교편문 讀小學立敎篇文>·<독소학명륜편문讀小學明倫篇文>·<독소학경신편문 讀小學敬身篇文> 등 소학에 관한 저술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천당지옥변 天堂地獄辨>을 지어 불교(佛敎)를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전라감사로 부임했을 때 <상점필재선생서 上佔畢齋先生書>·<상호남방백구약서 上湖南方伯求藥書>를 지어 자기추천을 간절하게 하기도 하였다. 김안국(金安國)·남효온(南孝溫)과는 동문(同門) 사이였다.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산당집≫ 5권이 있다.
 
3)김수항(金壽恒, 1629∼168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극효(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관(尙寬)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래(金琜)의 딸이다.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 : 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尹拯)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 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그가 속한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 측에서는 그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문곡집≫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김창협(金昌協, 1651∼170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경기도 과천 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성두(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해 전적에 출사한 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를 명에 의해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경기도 포천군)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면서도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기설에서 대체로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편집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977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사우를 복원하고,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또한 사우 뒤편에4위의 단비가 있다.
1) 최덕지영정과 유지초본-보물 제594호(1975.05.16지정)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초상화 원본 및 그 유지본. 비단 바탕에 설채(設彩). 세로 74㎝, 가로 53㎝. 보물 제594호.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전주최씨 문중(門中) 소장. ≪연촌유사 烟村遺事≫에 의하면 최덕지 영정은 원래 3본이 있었다 한다.
그 중 1본은 생시진상(生時眞像)으로서 존양루(存養樓) 옛터 근방 영당(影堂)에 봉안하였으며, 나머지 2본 중 1본은 녹동서원(鹿洞書院)에, 1본은 주암사(舟巖祠)에 봉안하였다 한다. 현재는 원본·이모본(移模本) 및 유지본(油紙本)이 전라남도 전주 최씨 문중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 중 원본·유지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본의 작품상 특색을 살펴보면, 우선 화폭은 가운데에서 연결된 연폭(連幅)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의 연폭 형식은 대부분이 3폭이다. 그래서 얼굴 부분이 들어가는 중폭(中幅)이 가장 크며, 양옆으로 두개의 소폭이 결봉되는 방식인 데 비하여 이 최덕지상의 연폭 형식은 특이하다. 인물의 복장으로 인하여 초상화가 더욱 주목된다.
모자는 감투형에서 평량자형(平凉子型 : 패랭이)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최덕지가 생존하였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한 형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입제(笠制)는 곧 발립[墩笠]의 형태이며, 포제(袍制)는 일색복(一色服)으로서 고려 말로부터 전승되어 온 원나라의 영향이 조선 초까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최덕지상의 차림새는 여말선초의 선비의 한거(閒居)하는 모습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에 나타난 안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화상은 만년기의 상이다. 안면 및 옷주름 처리에서 모두 사실에 비중을 둔 핍진(逼眞)에의 기도가 엿보인다. 발립은 반투명으로 속의 상투 부분이 검게 비치고 있으며,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다. 눈썹은 담묵으로 칠한 위에 그 털을 한 올 한 올 방향이 밑으로 숙여지게 표시하였다. 숱 많은 눈썹의 성격이 살아 있다.
짙은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눈매에서는 실제 눈에서 느낄 수 있는 생기 찬 명상적 눈빛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화사적 흥미를 끄는 것은 비화법(鼻畵法)이다. 최덕지라는 인물의 코 형태는 주먹코이다. 조선 초기 초상화의 대부분이 8, 9분면의 취세에도 코를 거의 옆모습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해서 이 화상은 코 처리에서 사상에 바탕을 둔 시각적 진실을 보여 준다.
안면 처리를 세밀히 살펴보면, 이른바 법령(法令 :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 및 뺨에 고심세(高深勢 : 높고 낮은 형세)가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 부위에는 안색보다 짙은 갈색으로 음영 처리가 되어 있고, 원공(귀의 圓文) 역시 그러하다. 바로 이 점이 개채(改彩)를 의심하게 한다.
≪연촌유사≫에 의하여 이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초상화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에 나주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가고 수년 후 파보니 그대로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개장의 필요가 있었던 듯 ≪연촌유사≫에는 ‘화상개장찬문(畵像改粧贊文)’이 수록되어 있다.
1610년(광해군 2년) 4월에 개장하여 덕진교(德津橋)로 옮긴 것이 1635년(인조 13년) 2월이라 하니, 그간의 시일이 오래 경과한 사유가 분명하지 않으나 개장 후 종손가에 환안한 것은 확인된다. 따라서 개장 때 개채가 가능하다. 이 개채로 인하여 원본이 손상되기보다 오히려 취(趣)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 화상은 안면 및 시선은 좌안 7분면이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으로 많이 돌이켜져 있기 때문에 자연히 오른쪽 어깨와 팔이 그 시각에 맞도록 돌려져 있다. 그것이 인물의 표현상 대칭성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면 표현적 특색으로 변질되어 있다. 또한 발 부분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손이 나와 있는 점이 그 뒤의 조선시대의 초상화와는 다른 특색을 보인다. 역시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연장임을 말해 준다.
최덕지상을 그린 화사(畵師)는 알 수 없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직관의 소지자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천익(愼天翊)의 화상찬이 말해 주듯이 이미 당대에도 그 우수함이 널리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초상화가 희귀한 시점에서 그 상용 형식·복색·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초상 예술의 본령이 사형(寫形)을 넘어 사심(寫心)이 있음을 대변해 주는 가작 중 하나이다.
 
2)녹동서원소장목판 및 고문서류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3호(1992.11.30지정)
≪서원청금안≫25책(1690~1844)≪서원서재유안≫2책≪합경재청금안≫3책(1807,1822, 1844)등 30책에 달하는 유안(儒案)이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심원록≫5책(1723~1811)≪합경재보노안≫3책(1822,1823, 1840) 등을 합하여 성책된 문서는 모두 38책이 보존되어 있다. 기타 고문서로 1659년에 작성된 존양녹동서원영선물자수집<통문> 1매를 비롯하여 청액시의 경비와 노비 방매의 내용이 기록된 <완의>1매(1701작성), 영당에 노비를 기증한 재용의 <명문> 1매(1716작성), 노비기증 <완의> 1매<1719작성>, 면역조처를 태린 예조<완의>1매(1803작성) 면역을 청하는 <상서>1매(1818)작성, 1868년의 서원 훼철시에 작성된 <순영감결> 1매 등 7건의 낱장 문서가 전존하여 있다. 다음으로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은 ≪연촌유사≫26판, ≪문곡집≫540판, ≪산당집≫54판 등 총 642판에 이르고 있다.
참고-목포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
 

관리자 12-11-21 14:20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는 영암(靈巖) 유일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다. 동으로는 월출산이 자리하고, 서로는 유달산이 있으며, 남으로는 영산강이 길게 뻗어 있다. 이곳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호남유림들이 “존양사(存養司)”라는 이름으로 인조 8년(1630)에 건립한 사우(祠宇)였으나 수차에 걸친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조정으로부터 사액(賜額)이 내려졌는데, 연촌선생의 도학이 주자와 같다고 하여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백(白)자를 제(除)하고 녹동이자(鹿洞二字)를 숙종대왕께서 사액하셨다.

 녹동서원에는 연촌(烟村)선생 외에도 그의 손자인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선생과 숙종 21년(1695)에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선생, 그리고 그의 아들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선생이 각각 추배되었다. 이때 녹동서원 영당에 연촌 문곡의 영정을 동시에 봉안하였다. 그 후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 되었으며 사위(四位)의 단비(壇碑)를 세워 제향하였으나, 훼철 후 이 곳에 있던 목판과 전적, 영정 등 관련 유물을 현재의 영보정(永保亭)이 있는 덕진면 영보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설(復設)한 것이다.
 

 연촌선생은 고려 우왕 10년(1384)에 제학(提學)을 지낸 최담(崔徐)의 사남(四男)으로 전주에서 출생하여 단종 3년(1455) 72세로 졸하였는데 자는 우수(迂璟), 호는 연촌(烟村), 존양당(存養堂)이고,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을 역임하고, 삼사의 요직을 거처 여러 주군을 다스렸으며 남원부사를 끝으로 영암의 영보촌에 한거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써 자경문(自警文)을 삼고 이를 위하여 존양루(存養樓)를 건립하니 안평대군께서 친히 현판에 수서(手書)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 성삼문(成三問),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등 당대 명경과 현대부들이 눈 내리는 노량진 나루터에서 지어준 40여 편의 송별시(送別詩)가 연촌유사에 수록되어 있고 지금도 영보정(永保亭)에 현판으로 그 일부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도 현재 영보리에 집성해 있는 1백여 전주최씨 후손들은 선현의 유적과 유물을 정성껏 관리해 고문서, 영정, 등이 잘 보관되어 있다. 특히 영정은 보물 5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문서 45권도 유형문화재 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촌선생은 매우 화려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조(古祖) 고려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을 지냈고, 증조(曾祖)가 중랑장(中郞將, 종5품)을 지냈으며, 조(祖)는 사온직장동정(司覓直長同正, 종7품)의 벼슬을 살았다. 부친은 조선조에 들어 참의(參議, 정3품), 제학(提學, 종2품)을 역임했다. 특히 박세채(朴世采) 선생이 지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보면 권양촌(權陽村)선생의 8대 고제(高弟)가 등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연촌선생이 끼어있다. 그것도 두형제 최직지(崔直之), 최득지(崔得之)와 함께 삼형제가 나란히 올라있다. 과히 “사제학가(四提學家)” 다운 명문가이다.

 만년에 연촌선생께서 직제학(直提學)을 버리고 퇴휴하고자 할 때 문종은 연촌선생의 인품과 학행을 높이 사 그의 퇴직을 극구 만류했다. “나이 70이 채 못 되었고, 짐이 봤을 때 그 사람됨이 순실하니 더 머물러 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많은 정신들도 연촌선생을 붙들며 “임금이 저러한데 좀 더 함께 일하는 것이 성은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연촌선생은 “머무르면 빈 벼슬이요, 가는 것이 내 분수이다. 내가 세상을 잊은 것은 아니다.”며 자기 심경을 밝힌 뒤 귀향한다. 누구도 그의 행동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연촌선생이 귀향하고 얼마 안 있어 문종이 갑자기 승하했다. 바야흐로 권력투쟁의 피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기막힌 시점에 관직을 뒤로하고 물러난 연촌선생의 행동을 후학들은 “도여(神謀)”라고 중용의 경구를 빌려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이직(李稙)같은 학자는 “연촌의 당시 행적은 오히려 사육신(死六臣)보다 더 가상한 바 있다.”고 적고 있다.

 연촌선생은 월출산 아래에서 오로지 독서, 저작, 강학(講學)에만 힘썼다. 유사(遺事)에는 “선생이 장차 여기에서 몸을 마치려 했다.”고 적혀 있다. 재 출사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는 애기다. 흔히 권근(權近)선생을 길재(吉再)에 이어 김숙자(金淑滋)를 거쳐 김종직(金宗直)에 이르는 영남학파와 견주어 기호(畿湖)학파의 효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연촌선생은 그 사승(師承)을 이쪽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려고 애썼던 것 같다.

 정유(丁酉)병화로 유적과 저술, 등이 모두 불타버리기 전까지는 순덕(淳德), 고절(高節), 정학(正學)의 도학규범이 영보촌에 오롯이 전해왔던 것이다. 존양루(存養樓)에는 연촌선생 사후에도 이름있는 후학들이 많이 찾아와 그를 기리는 시문을 읊고 가곤 했다. 연촌선생은 녹동서원 외에도 덕진면 영보촌의 유적지와 영당(影堂), 전주의 서산서원(西山書院),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등에서 사림과 후예들의 각별한 경배를 받고 있다.
예로부터 선비의 3대 거취 방법에 경세(經世)의 순덕(淳德), 숙세(淑世)의 고절(高節), 풍교(風敎)의 정학(正學)이 있는데, 연촌선생께서는 이 셋을 두루 갖추신 분으로 보여 진다.
(이재영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