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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성건(朴成乾, 1418~1487) 상서공 휘 선의 10세손으로(문원공파) 자(字)는 양종(陽宗), 호(號)는 오한(五恨), 부(父)는 공조판서 승정원 도승지 좌사외보 만호 박언(工曹判書 承政院都承旨 坐事外輔 萬戶 朴彦)이다. 1418(태종 18) 금성(나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따라 문산제에서 수학하였다. 1453(단종 원년) 진사시합격, 1472(성종 3년) 문과급제 금성교수(錦城敎授), 1480(성종 11년) 춘추관 서기관(春秋館書記官), 소격서령(昭格署令), 장수현감(長水縣監), 1487년(성종 18년) 음 11월 18일 졸 하였다. 학문에 능통하여 금성별곡(錦城別曲)을 남겼다. 오한공의 묘는 영암 삼호면 용당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초에 시제를 모신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죽정서원(竹亭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2)박권(朴權, 1658∼17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성(衡聖), 호는 귀암(歸庵). 희남(希男)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목사(牧使) 시경(時璟)이며, 어머니는 부사 김인량(金寅亮)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윤하제(尹夏濟)·조사기(趙嗣基) 등의 잘못을 소로 통박했다가 도리어 평산(平山)에 유배되었다. 1692년(숙종 18)에 풀려나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서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어 정언(正言)이 되어 장희재(張希載)를 정법(正法)대로 처리할 것과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을 공격한 유생들의 정거(停擧 :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는 것)를 완화해줄 것을 상소했다가 다시 체직되었다. 곧 다시 서용되어 부수찬·교리를 거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삼사의 여러 직을 역임하였다. 이어 1697년 외직으로 나갔다가 이듬 해 파직당하였다. 이어 예조참의가 되어 과장(科場)의 폐습을 일소해보려고 상소했다가 구설에 휘말려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황해·영남의 감사를 거쳐 이조참의 때 교리 박필명(朴弼明)의 탄핵을 받고 은거하였다. 대사간 등의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다가 경기감사·강화유수(江華留守) 등에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171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 해 한성우윤이 되었다. 이 때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로 백두산에 올라가 지형을 답사한 뒤 조·청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증거로서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호조와 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굳세고 과감해 별로 친히 지내는 사람이 없이 사람들로부터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부름을 받았고 또 맡은 일도 잘 처리하였다. 영암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다. 3)박규정(朴奎精, 1498~1580) 상서공(尙書公) 12세 손으로 2파 문원공(文元公) 지빈(之彬)의 4子 계원(季元) 5대손(오한공(五恨公)성건(成乾)의 孫子) 이시다. 대동계 창설의 주역으로 자는 춘중(春中) 호는 삼도수옹(三島壽翁)이시다. 효성과 학문이 뛰어나 의병장 고경명은 시를 지어 찬양했고 상진(尙震)은 학문의 뛰어남을 나라에 추천하기도 했다. 당시 구림동장으로 이모 등과 같이 대동계 창설을 주도했으며 임구령, 신희남, 이후백, 백광훈 등과 함께 영암 향약을 창설하고 향안을 마련하는데도 역할이 컸다. 1580년 83세로 졸(卒)하였고 1683년 죽정서원에 모셔졌다. 4)이만성(李晩成, 1659∼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추(士秋), 호는 귀락당(歸樂堂)·행호거사(杏湖居士). 할아버지는 유겸(有謙)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숙(䎘)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오백령(吳百齡)의 딸이다. 중부(仲父)인 지평(持平) 영(翎)에게 입양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6년(숙종 22) 진사로 정시 문과에 장원해 전적(典籍)·좌랑을 거쳤다. 지평 겸 지제교로 있을 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면서 오도일의 아들 봉휘(鳳輝)를 합격시킨 데 대해 반박하는 소를 올려, 마침내 그를 파방(罷榜 : 과거 급제를 무효로 함)시켰다. 이어 교리·응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06년 대사헌 겸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지내고, 1709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어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저술한 ≪예기유편 禮記類編≫에 주자(朱子)의 글귀를 고친 것을 논죄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었다. 이듬해 숙종이 후회하고 ≪예기유편≫을 모두 불살라버린 다음 복관(復官)시켜 이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716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경종이 즉위하면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형(銓衡)을 엄정히 하고 행신(倖臣)의 폐를 막아 침체한 정사를 진흥시켰다. 노론으로서 1721년(경종 1)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노론 대신들과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세제(世弟) 책봉을 주청해 실현시켰다. 그러나 소론이 일으킨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불려와서 국문을 받다가 64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다. 영암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귀락당집 歸樂堂集≫이 있다. 5)박승원(朴承源, 1562∼?)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계유(季悠), 호는 설파(雪坡). 아버지는 직장 대기(大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켜 광주로 가서 고경명(高敬命)·고종후(高從厚) 부자와 합할 때, 형 장원(長源)과 함께 종군하여 여러 곳에서 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임환(林懽)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계원도유사(繼援都有司)가 되었으며, 군사와 군량을 모집, 조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북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자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75세의 고령으로 고향의 지사 조행립(曺行立)과 함께 근왕병(勤王兵 : 왕실을 지키는 병사)을 모집하였는데, 이흥발(李興浡) 등을 그 휘하에 거느렸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화친이 이루어지자 군사를 해산하고 영암(靈巖)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덕행이 보고되어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무안(務安)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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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4칸의 강례당(講禮堂), 간죽정(間竹亭), 3칸의 화수정(花樹亭), 1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조양영당(朝陽影堂), 고직사(雇直舍), 조양재사적비(朝陽齋事蹟碑),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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