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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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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이재인(李在仁) 이항복(李恒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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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년(명종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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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상정(上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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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서원소장 익재영정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4호(1988.03.16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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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서원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장수현감을 지낸 이재인(李在仁)이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로 종손자 이원(李黿)이 화를 입자 이제현(李齊賢)의 영정을 모시고 장성군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정자를 짓고 화초를 기르면서 후학들을 교육했는데, 그이 후손 이대정이 1559년(명종 14)에 그곳에 백산사(白山祠)를 짓고 조상들의 제사를 받든 데서 시작되었다. 왜란을 겪으면서 집이 퇴락하자 후손 이언경(彦慶)이 1776년(영조 52)에 낭월산 남쪽 가산에 옮겨 지으면서 가산서원이라 부르고 이재현(李齊賢)을 주벽으로 모시며 이항복(李恒福)을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영정만을 모신 영당으로 남았다가 1960년에 중건하였으며, 1998년에 장성향교의 발의로 이재인을 추가 배향했고 익재의 영정은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향일은 음력 8월 10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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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이제현(李齊賢, 1287~1367) 호는 익재(益齋), 본관은 경주로 고려 말의 성리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네 번이나 수상을 역임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려는 간신들의 음모를 막아 고려사직을 보전했다. 일찍이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가서 만권당을 중심으로 조맹부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학문을 연찬했고 고려국사를 편찬한 역사가며 공민왕을 즉위시켜 고려의 자주정책과 원에 아부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하여 사대부 중심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했다. 학자이면서 시와 서예 및 그림에도 뛰어나 삼절(三絶)의 명성을 지녔다. 공민왕 사당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2)이재인(李在仁, 1415~?)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며 호는 정헌이고 이제현의 5세손으로 김종직과 도의를 강론했고 장수현감을 지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종손이며 제자인 이원이 화를 입자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익재의 영정을 모셔놓고 화초정, 관개정을 지어 제자들을 길렀는데 아들로 순천부사를 지낸 공신 이조정랑을 지낸 공형(公衡) 그리고 이유인 남주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딸은 단종복위 거사로 살해된 봉여해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3)이항복(李恒福, 1556∼1618) 호는 백사, 본관은 경주로 이제현의 일족인데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왜란 때 도승지로 국란국복에 공헌했으며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의 패륜을 비판하다가 함경도 북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 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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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서원의 건물은 영당, 가산사(佳山祠) 3칸, 강당 4칸, 내·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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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산서원 소장 익재영정-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4호(1988.3.16지정) 가산서원에 있는 이제현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원화의 모습을 상당히 유사하게 옮겨 그린 모사본이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초상화에 대한 글이 적혀 있어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원화는 1319년(충숙왕 6) 이제현이 왕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그린 것인데 충선왕이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고, 또한 초상화에는 당대의 석학 북촌 탕병룡(湯炳龍)이 글을 써 넣었다. 그러나 당시 이제현은 귀국하면서 이 그림을 가져오지 못했다가 31년 후에 우연히 이 영정을 다시 보게 되어 자신도 감회의 글을 써넣은 것이다. 가산서원의 영정은 의자에 손을 맞잡고 앉은 전신상으로 의자 뒤로 서책과 가야금 향로가 놓여진 탁자가 배치되어 있다. 옮겨 그린 것이지만 얼굴 처리나 옷주름 표현, 의자나 기물 등의 묘사가 상당히 원본에 가깝게 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눈동자나 수염, 입술 등은 더 후대에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다시 옮겨 그린 연대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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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장성군사편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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