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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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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 양자징(梁子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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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선조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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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현종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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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 8월 중정일(中丁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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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42호(1976.4.23지정) 필암서원 문서일괄보물-제587호(1975.05.01지정) 장성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6호(1999.07.05지정) 장성필암서원≪하서산생문집≫의 목판 649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5호(1999.07.05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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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를 주향하고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梁子徵)을 배향한 서원이다.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卞成溫)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는데,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고향마을인 기산 아래에 창건되었다가 병화로 없어진 것을1624년(인조 2)에 복원했다. 1662년(현종 3)에는 ‘필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徵)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나 6.25사변 때에도 피해를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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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전라남도 장성 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해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 년도 채 못 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해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해,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였다. 즉,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해,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또한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그는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事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양자징(梁子徵, 1523~1594)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자는 중명(仲明), 호는 고암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이다. 산보(山甫)의 아들로 창평 출신이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성장하여 하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효자로 천거되어 사관(祀官)에 발탁되었다. 이어 거창현감을 거쳐 석성현감을 지내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하서집의 가장을 썼으며, 1786년 장성 유림의 발의로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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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廓然樓)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淸節堂),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살문·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1)확연루(廓然樓) 이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기와집으로 영조 연간에 두 번 중·개수되었고, 문루의 편액은 송시열의 글씨이다.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주두·첨차·소로(접시받침)·쇠서(소의 혀 모양으로 된 장식)로 결구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후면 양측 추녀의 사래를 활주로 받치고 있다. 2)청절당(淸節堂)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청절당(淸節堂)’ 편액은 송준길, ‘필암서원’ 편액은 윤붕구가 썼다. 청절당의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둔 것으로 보아, 본래 이 건물은 진원현(珍原縣)의 객사였던 것을 1672년에 옮겨 온 것이라는 기록을 입증하고 있다. 이 청절당은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꾸몄다. 가구(架構)는 오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일반적인 가구수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3)동·서재 서측의 숭의재(崇義齋)와 동측의 진덕재(進德齋)는 영조와 고종 때 중·개수된 것으로 서원의 동·서재를 이루고 있다. 4)경장각 서재 옆으로 3칸의 경장각이 있다. 인종의 어필묵죽을 소장하고 있으며, 액호는 정조의 어필이다. 5)우동사(佑東祠) 4칸 반의 사우이다. 북벽에는 김인후를 동벽에는 양자징을 향사하고 있다. 1957년 이 사우를 우동사(佑東祠)라 현액하였다. 전면 반 칸은 툇간(退間)으로 개방하였고 나머지는 통간(通間)으로 하였다. 장대석은 바른층쌓기로 처리한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툇간의 초석은 단면이 팔각형인 장주형 초석(長柱形礎石)을 이루고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두 개를 놓아 이익공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쪽 박공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6)기타 동편재 옆에는 묘정비가 있고 장서각에는 전적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동북쪽 토담 밖에 있는 장판각에는 ≪하서산생문집≫의 목판649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5호)를 소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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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필암서원 문서일괄보물-제587호(1975.05.01지정) 서원 내 건물 중에 장서각과 장판각이 있는데 이곳에 각종의 전적과 ≪하서집≫의 판목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인종의 <묵죽墨竹>과 <하서유묵 河西遺墨> 등이 보관되어 있다. 필암서원의 고문서류를 살펴보면, 서원의 역대임원명부인 ≪원장선생안≫1책,≪필암서원집강안≫1책, 서원운영에 관계되는 ≪문계안≫, 학생들의 명부인≪필암서원서재유안≫1책, ≪필암서원원적≫4책, ≪장성필암서원성책≫등이다. 또한 서원에 소속되었던 노비들의 족보인 ≪노비안≫,≪전답안≫, 관련된 인사들의 방명록인≪봉심록≫1책, 양자징과 관련된 품목 등 모두 16책과 완문과 절목, 상서문, 통문 등 고문서류 64매가 소장되어 있다. 2)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6호(1999.07.05지정) 1610년(광해군 2)에 새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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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장성군사편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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