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주벽-민정중(閔鼎重, 1628~169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여준(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기(機)이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9년(인조 27)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으로 뛰어나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그의 충성을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이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대사간으로 나아갔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삼사에 재직할 때는 청의(淸議)를 힘써 잡았고, 대사성에 있을 때는 성균관의 증수(增修)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해 선비 양성의 효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 갔다. 이듬 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이 때 호포(戶布) 등 여러 가지 일을 실행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반대에 부딪혔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노봉연중설화 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 壬辰遺聞≫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 右相李浣碑>·<개성부유수민심언표 開城副留守閔審言表>·<개심사대웅전편액 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민유중(閔維重, 1630~168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여준(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대사헌 기중(蓍重)과 좌의정 정중(鼎重)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봉교·세자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1662년(현종 3)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교리, 사간원헌납·경상우도염찰사·이조정랑·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663년 이후 이조정랑·홍문관교리·응교·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사도시정(司䆃寺正)·의정부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내직으로 들고, 이어 장례원판결사·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내다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과 다툰 끝에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 은거하였다.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리고 1671년부터 형조판서·대사헌·의정부우참찬·한성부판윤·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끝내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 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 閔文貞遺集≫ 10권 10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이민기(李敏琦, 1646~1704) 원욱(元郁)의 아들이며 자는 경징(敬徵)이요 호는 만수재(晩守齋)이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민정중의 수제자로 서원 건립에 크게 기여하고 학덕이 뛰어났다고 한다. 인조(仁祖) 二十四年 병술(丙戌)에 출생하고 숙종(肅宗) 三十年 갑신(甲申)에 졸(卒)했으니, 금계사(金溪祠)에 향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