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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정개청(鄭介淸, 1529∼159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 나주 출신. 아버지는 봉산훈도 세웅(世雄)이며, 어머니는 나씨(羅氏)이다. 유년 시에 보성군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 년간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의 잡학을 강구하였다. 그 뒤 산에서 나와, 서울에서 박순(朴淳) 등과 종유하며 학문을 강구한 뒤, 만년에 전라도 무안의 엄담(淹潭)에 이주해 윤암(輪巖)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예학(禮學)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74년(선조 7)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지만, 수차의 관직 제수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그의 관직생활은 46세에 북부참봉을 지낸 이후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쳤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 때 이의 처리과정상 연루자의 색출이 지방 사류에게까지 확대되는 와중에서,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7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가문이나 관직생활은 평범해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사상(史上)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피화된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 그를 봉사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엄담에 건립된 뒤1694년(숙종 20)까지 집권세력의 당색에 따라 몇 차례 치폐(置廢)를 반복,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산서원의 치폐는 남인의 집권 시에 건립, 복설되고, 서인의 집권 시에는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도 기복을 겪는다. 또한,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되어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스승으로는 서경덕(徐敬德)과 박순의 이름이 거론되나 전후사정을 검토해볼 때 박순에의 종유설이 보다 타당하게 보인다. 문생들이400여 명에 달했다 하는데, 그 중 저명한 자로는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나덕현(羅德顯)·나덕원(羅德元)·안중묵(安重默)·최홍우(崔弘宇)·정식(鄭湜)·유양(柳瀁)·윤제(尹濟) 등 당시 호남지방의 유력한 가문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주목된다. 저서로 ≪우득록 愚得錄≫이 있다. 정개청과 자산서원 곤재 정개청.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다가 17세에야 화담 서경덕 선생 밑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보성 어느 절에서 중이 되어 역학과 천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37세(1565년)에 함평 엄다면 제동마을에 정착하여 학생들을 가르친바 유생이 4백명에 이르렀다 한다. 한동안 당시의 영의정 박순의 제자가 되었다고도 하며, 곡성현감도 지냈다. 또한 왜국과의 전운이 감도는 1586년경에는 선조 임금에게 도원수감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가 된다. 기축옥사라고도 불리는 정여립 사건은 동인이었던 전주의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고 지방세력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중앙 및 호남 지역 유학자등 1,000여명이 문초를 당한 사건이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 사건을 조선시대의 광주 5.18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호남지역의 동인 계열 유림들은 모조리 곤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정개청도 이발등과 함께 모반에 가담하였다 하여 국문을 당하였고, 1590년 그의 나이 62세에 함경도 경원에서 유배중에 죽고 만다. 정개청이 나주 감옥에 갇힌 때는 봄인데도 서리가 심하게 내리고 대추만한 우박이 4일간이나 내려 함평 나주 지방 사람들이 하늘도 노(怒)하시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정개청은 정여립 사건의 조사책임자인 송강 정철과 소원한 관계였단다. 대사헌이었던 정철이 동인의 탄핵을 받아 1584년에 담양 창평에 내려와 4년간 은거 중 일 때 정개청은 곡성현감으로 있으면서도 찾아보지도 않았고 정철의 품행에 대하여 공박하는 등 서로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감찰 책임자였으니 정개청의 수난은 예상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정개청을 따르던 제자 50여명이 죽고 20여명이 유배당하는 등 곤욕을 치른다.
그런데 정여립 사건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2년 뒤인 1591년에 세자 책봉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몰락하게 되고 정철은 유배당하게 된다. 어부지리로 동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정개청에 대한 신원 운동이 활발해졌고 마침내 광해군 8년(1616년)에 정개청은 역적의 누명을 벗고 함평군 엄다면에 서원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게 되자 효종 8년(1657년)에 서인 송준길의 상소에 의거 서원이 철폐된다. 그 당시 동부승지였던 남인의 고산 윤선도는 서원의 복설을 상소하였으나 송시열등과의 논쟁에서 패배하여 오히려 파직을 당한다.
한편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제2차 예송논쟁에서 이긴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당시 우의정인 남인의 허목(허목은 나주의 백호 임제의 외손자임)은 숙종 3년에 서원의 복설을 주청하였고 숙종이 윤허하니 2차 건립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숙종 5년에는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다. (사액서원은 사설기관인 서원이 국가의 공인을 받아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음) 그러나 숙종 6년(1680년)에 남인이 경신대출척으로 물러나자 자산서원은 다시 문을 닫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 곤재 정개청 선생의 추종 하였다하여 옥에 가둔 유생이 50명, 귀양 보낸 자가 20명, 금고된 자가 4백명에 달하였다 한다. 달이 차면 또 기울고 세상사는 또 반전 되는 것인가. 숙종 15년(1689년)에 기사환국(장희빈 소생의 세자(후에 경종) 책봉에 서인이 반대하여 서인이 축출되는 사건)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서원은 세 번째로 복원이 되고, 숙종 28년에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정을 하자 세 번째로 훼철이 되고 영조 28년에 네 번째 복설 영조 38년에 네 번째 문을 닫고, 1789년 정조 13년에 다섯 번째 복설이 되는 등 중앙정치에서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 다시 말하면 서인과 남인의 정권 장악 여부에 따라 자산서원은 문을 닫고 다시 문을 여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정개청을 배향하는 서원의 철폐와 존립 문제를 두고 중앙의 정치가 남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다. 이런 서원은 1868년 고종5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마침내 다섯 번째 철폐가 되었고 해방이후 1957년에 복설이 되었으며 1988년 이후 대대적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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