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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김승주(金承霔, 1354∼1424)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초명은 을보(乙寶). 본관은 순천(順天). 한발이 심해 그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마침 많은 비가 왔다. 이 일로 특별히 이름을 승주라 고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주목사(定州牧使) 유정(惟精)이다. 1380년(우왕 6) 흥위위별장(興威衛別將)로 관직에 들어선 뒤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거쳐, 1389년(창왕 1) 풍주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 때 풍주 연해를 노략질하던 왜구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되자 1393년(태조 2)에 전중경(殿中卿)에 오르고, 이어서 이성만호(泥城萬戶)가 되었다. 1394년에 의흥삼군부첨절제사(義興三軍府僉節制使)가 되었다가 그 해 형조전서로 전임하였다. 1396년 동북면청해도안무겸찰리사(東北面靑海道安撫兼察理使)로 나가 야인 진압에 공을 세웠고, 호조전서·이조전서·중추원부사·경상도병마절제사·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400년(정종 2)에 좌군총제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태종 초에 강계만호에 이어 공조판서·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냈다. 1406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에 동북면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도순문찰리사 등을 지냈다. 1409년에 야인이 경원(慶源)에 침입하자 왕명을 받고 나가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참찬의정부사에 이어 1413년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절제사·평양부윤을 지냈다. 1414년 병조판서로 있다가 이듬해인 1415년에 평양군(平陽君)으로 개봉되었으며, 판중군도총제(判中軍都摠制)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 평양부원군에 가봉(加封)되고, 이어 1423년(세종 5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71세로 졸하였다. 시호는 양경(襄景)이다. 2)김종서(金宗瑞, 1383∼1453) 도총제 추(錘)의 아들로 1405년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1419년 (세종 1년) 시간원우정언이 되었다. <고려사> 편찬 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세종실록>의 총제관을 거쳐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그 후 문종의 유명으로 단종을 옹위하던, 재상 가운데 지용을 겸비한 명신으로서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 3)김효우(金孝友) 순천김씨 남은공(南隱公) 효우는 1450년(세종 32) 19세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과 덕망이 탁월하여 임금의 총애가 깊었다.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낙남하여 정착하게 된 곳이 흑석산 아래 이곳 청계(淸溪)라고 한다. 이곳에서 마의초식(麻衣草食)하면서 우물을 파고 소나무, 동백 등을 심으며 후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4)김류(金瑬, 1571∼16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수렴(粹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 훈(壎)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여물(汝岉)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그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과 풍악을 벌여 놀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이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반정의 주류들간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 때 가도에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 회유해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장만(張晩) 밑에서 부체찰사로서 먼저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후 장만·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께 청천강 남쪽의 안주(安州)를 중심으로 하는 도체찰사 중심의 적극적인 방어 체제 구축을 주장하였다. 그 해 우의정으로 승진되고 이듬해에는 유효립사건(柳孝立事件)을 처리했으며,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 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령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총융사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 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해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도형(圖形)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 해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문제에 반대해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33년 다시 좌의정으로 올라 도체찰사를 겸직해 군령권까지 겸했으며, 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해 인조의 노여움을 사 1634년 다시 면직되었다. 1634년 인조가 전국에 교서를 내려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였다. 이 해 다시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관계 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 뒤 영의정이 되어 국정권도 아울러 장악하였다. 한편, 도체찰사로서 전국 각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을 정선해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이전에 구상해왔던 안주 중심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안주가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해 평양·황주·평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곳의 산성에 주된 병력을 배치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아군의 편제된 산성 중심의 방어 체제를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오자 인조를 강도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론이 엇갈린 가운데 적이 이미 서울 교외까지 진출하자 인조를 비롯한 군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듬 해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좇아 삼전도에서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을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는 한편, 영춘추관사로서 실록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에 의해 탄핵을 받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가, 이듬 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위되었다. 이 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학문은 서인 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었으며, 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했으나, 되도록 서인과 남인을 같이 쓰려고 노력하였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했으며 시·율도 역시 정련청건(精鍊淸健 : 세련되고 맑으면서 건실함)하였다.글 또한 기묘해 공경(公卿)의 비문을 많이 썼다. 저서로는 ≪북저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