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趙光祖)와 양팽손(梁彭孫)을 배향한 서원이다. 죽수서원은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1570년(선조 3)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로 능성(현 화순군 능주면 일원)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조광조와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양팽손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성에 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의리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유배된 지 1개월이 못 되어 사약을 받고 숨지게 되자 양팽손은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화순 쌍봉사 골짜기인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서원터)마을에 모옥을 짓고 봄, 가을로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1568년(선조 1)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어 1570년(선조 3)에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현 위치인 천일대에 서원을 짓고 ‘죽수’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 뒤 1613년(광해군 5)서원을 중수하였고 1630년(인조 8)도내 유림과 조정에서는 사계 김장생 등의 발의로 양팽손을 추배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헐리고 단(壇)만 마련해서 제향하다가 1971년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다시 1983년에 본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의 사액을 받은 현 위치인 모산리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주벽-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호는 정암(靜庵)이다. 17세때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金宏弼)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은
경내는 중앙에 정명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되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9년 동재,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중요물건(관련유적) 1)정암적려지(靜庵謫廬址)-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1979.08.03지정)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되어 살았던 집은 당시 관노 문후종(文厚從)의 초가 3간 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일대이다. 현재 이 초가를 복원하여 1979년 8월 3일에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4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적려지 초가 옆에는 조광조의 영정각과 강당도 새로 지어져 적려경내를 새로 단장하였다.
2)유허비(遺墟碑)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적려지에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조광조 유배지의 대표 상징유적이다. 이 유허비는 1667년(현종8)에 당시 능주목사 민여노(閔汝老)가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비문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액전서(碑額篆書)는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처음에는 비문만 세워져 있다가 비각은 정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분명치 않으며 다만 비각중수기(정암의 11세손 趙性敬 撰)에 의하면 1876년(고종 13)에 양정환(梁廷煥)이 주력하여 비각의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죽수서원유지추모비(竹樹書院遺址追慕碑) 죽수서원이 사액서원이지만 대원군 때에 훼철된 것은 조광조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과 겹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훼령 이후에 죽수서원이 철훼되자 그 서원유지에 추모비를 세웠다. 양재경(梁在慶)의 주선으로 비문은 최익현(崔益鉉)이 짓고 음기는 송병순(宋秉珣)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