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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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지곡서원(芝谷書院)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조 흡(曺 恰) 조대중(曺大中) 조수성(曺守誠) 조수홍(曺守弘) 조 엽(曺 熀)
   1584년(선조 17)
   
   
   
1584년(선조 17)에 도유림이 조흡(曺恰)의 서원을 전북 고창군 금과면 고례촌에 건립하여 향사하고 명액(命額)을 예천(禮川)이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시에 병화로 인하여 소진되었다. 그 후 1785년(정조 9)에 도내장보(道內章甫)가 연명발통(聯名發通)하여 화순역정(和順櫟亭)에 중건하여 액(額)을 역정서원(櫟亭書院)이라 하고 조흡의 5세손인 조대중(曺大中) 및 6세손 조수성(曺守誠)과 동 조수홍(曺守弘) 그리고 칠세손 조엽(曺熀)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됨에 따라, 화순읍 지곡중록(芝谷中麓)에 별묘를 건립하여 백여 년간 향사하다가 1996년에 별묘가 있는 서원지에 서원을 복설하고 익년 정축(丁丑) 춘(春)삼월육일에 봉안하니 이름 하여 지곡서원이라 하다.

1)주벽-조흡(曺恰, ?~1429)
조흡의 초휘(初諱)는 洽이며 호는 퇴사헌(退思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고려좌시중 조민수의 손자이며 한성판윤 조린의 아들로 고려 말에 경남창녕에서 출생하였다. 태종잠저시에 운곡 원천석선생 문하에서 태종과 함께 수학하였다. 정종 2년(1400) 박포의 난에 공훈을 세우니 익년 태종 원년(1401)에 공신에 책훈(策勳)되어 녹권(錄券)이 하사되며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고 옥천군에 봉해지니 선생이 상소하여 인사(因辭)하였다.
관작은 문과에 급제한 후 안산군수상호군가선대부 우군도총제부동지총제 전라도시위사절도사(安山郡守上護軍嘉善大夫 右軍都摠制府同知摠制 全羅道侍衛司節度使), 가정대부 중군도총제부총제겸판군기감사 전라도절제사겸나주목사(嘉靖大夫 中軍都摠制府摠制兼判軍器監事 全羅道節制使兼羅州牧使), 풍해도병마도절제사(豊海道兵馬道節制使), 영길도도순문사우군도총제평안도도절제사사은표전사(永吉道都巡問使右軍都摠制平安道都節制使謝恩表箋使), 경상우도병마도절제사(慶尙右道兵馬都節制使), 정헌대부 우군도총제(正憲大夫 右軍都摠制) 등을 역임하고 은퇴 후에는 소봉지지(所封之地)인 옥천에 내려와 후학교수에 여생을 바치니 많은 영재들이 배출되었다.
세종 10년(1429)에 서거(逝去)하니 조정에서는 삼일 간을 철조치전(輟朝致奠)하고 병자일(庚子日)에 견관사제(遣官賜祭)하였다.그 후에 공희(恭僖)의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를 증직하였다.
 
2)조대중(曺大中, 1549~1590)
조선의 무신. 자는 화우(和宇), 호는 정곡(鼎谷), 참봉(參奉) 세명(世明)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1576년(선조 9) 진사(進士)가 되고, 158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9년 전라도 도사(全羅道 都事)로 지방을 순시하다가 보성(寶城)에 이르러 부안(扶安)에서 데려온 관기(官妓)와 헤어지며 석별(惜別)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잘못 전해져 때마침 반란을 꾀하다 죽은 정여립(鄭汝立)의 추형(追刑)을 슬퍼한 것이라 하여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鞫問)을 받다가 이듬해 장살(杖殺)되었다.
 
 
3)조수홍(曺守弘, 1570~1644)
본관은 창녕이며, 字는 계의(季毅), 號는 사촌(沙村)이다. 玉川君 恰의 后, 사마(司馬) 鶴灘 敏中의 子이다. 선조(宣祖) 병오(丙午)에 생원(生員)하고 동년(同年)에 등과(登科)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이르렀다. 사친(事親) 지효(至孝)하여 宇量이 宏深하고 聰明이 過人하여 경전백가(經傳百家)를 과안(過眼) 성송하였다. 홍범연의(洪範演義)를 저술(著述)하니, 세칭(世稱) 이학명유(理學名儒)라 하였다. 기축(己丑) 五賢의 寃狀을 진소청신(陳疏請伸) 하였을때 上이 殿庭에 인견(引見)하니 풍채(風采)가 동인(動人)이라 天語가 溫諄하였다.
익년(翌年)에 졸(卒)하니 蒼石 李埈이 悼之 曰, 사인지부행(斯人之不幸)은 비단(非但) 邦家之不幸이요, 식사문지부행(寔斯文之不幸)이라 하였다. 櫟亭祠에 배향(配享)되었다.
 
4)조수성(曺守誠, 1574~1608)
조선 후기의 의병장. 본관은 창녕(昌寧). 병조판서 흡(恰)의 후손으로, 현감 굉중(閎中)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학문이 정미(精微)하고 언행이 독실하여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병자호란 때 종질 황(煌)과 읍 사람 최명해(崔鳴海)·임시태(林時泰) 등과 더불어 창의하여 격문을 사방에 돌려 군량(軍粮)을 모집하였다. 한림 양만용(梁曼容), 옥과현감 이흥발(李興浡)형제, 순창군수 최온 등과 더불어 여산군(礪山郡)에 모여 남한산성을 향하던 중, 청주에서 적과 화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려(軍旅)를 해산하였다.
그 뒤 참판 김반(金槃)이 이를 듣고 천거,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일에 뜻을 끊고 일생을 마쳤다.도내의 사림들이 건의하여 산산(蒜山)의 역정사우(櫟亭祠宇)에 배향되었다
 
5)조엽(曺熀, 1600~1665)
조엽의 자는 회이(晦而), 호는 구봉(九峯), 통덕랑 수훈(守訓)의 아들이다. 1624(인조 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효종 때 선공감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는 이기발(李起浡)과 더불어 경상도 일원 7개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가 강화가 성립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구봉산(九峯山)에 은거하였다. 1804(순조 4)년에 정려(旌閭)의 명이 내려졌고, 사복시정이 추증되었다. 시(詩)에는 병자호란 때 그가 의병을 이끌고 청주까지 왔다가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자 못하여 지은 것이 있는데 그의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찬(贊)의 「삼학사찬(三學士贊)」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가 참형을 당한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三學士)의 충절을 노중연(魯仲連)과 소무(蘇武)에 비겨 찬양한 글이

서원은 마을로부터 약 2㎞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면에 강당 1개와 후면에 사당이 놓인 전학후묘형으로 남동향으로 외삼문과 내삼문이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조흡을 위시해서 조대중, 조수홍, 조수성, 조엽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부일사와 강당인 지곡서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홑처마 박공지붕으로서 초익공 공포를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굴도리를 사용한 5량 구조로 12㎝ 높이의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역시 같은 재료를 다듬은 정평주초가 지름30㎝의 원주를 받치고 있다.
사당인 부일사는 서원 정면인 남동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외1출목의 이익공,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굴도리를 사용한 5량 구조이다. 강당과 마찬가지로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기단은 78㎝ 정도의 흙을 돋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주초는 화강암을 다듬은 정평주초로 지름 30㎝ 두께의 원기둥을 받치고 있다.


참고-지곡서원복설추진위원회, ≪지곡서원복설예성≫, 1997.
화순군청 http://www.hwasun.go.kr/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사진-창녕조씨 홈페이지
http://choga.wo.to/choga2a/jwasijung.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