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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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산서원(華山書院)
   전라북도 진안군 언천면 백화리 905
   황 희(黃 喜) 황보신(黃保身) 황 징(黃 澄)
   1922년 서원으로 승격
   
   봄가을
   황방촌영정-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9호(1987.04.28지정)
화산서원은 황희(黃喜)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자손인 황보신(黃保身), 황징(黃澄) 등을 배향하고 있는 중배실 황씨들의 사당이다.그 서원은 중배실의 남쪽 앞마을로서 진안~무주간 도로의 북쪽 500m, 백화초등학교 북쪽의 나지막한 산기슭 언덕빼기에 있는 대추말의 길가에 자릴 잡고 있으며 그 부근에는 역시 황씨 집안의 인물들인 황교찬(黃珓燦)과 육씨 부인의 효자각과 열녀각이 있다.
화산서원은 그 서원의 강당에 있는 현판들의 기록에 의하면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고 1970년 2월에 또 중수되었다. 특기할 것은 1970년대 말까지도 이 서원에 딸린 하인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1)주벽-황희(黃喜, 1363∼145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2)황보신(黃保身)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중전(仲全)으로 황희의 아들이다. 성품이 인후하여 도량이 넓었고 효우(孝友) 또한 지극하였다. 벼슬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호조정랑(戶曹正郞) 호군(護軍)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3)황징(黃澄)
호는 정암(靜菴)으로 황희의 5대손이다. 종사랑(從仕郞)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에 녹훈(錄勳)되고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화산서원은 평평한 대지위에 긴 네모꼴의 담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담 안은 남쪽의 두 구역으로 나뉘어 뒷부분 뒷담 쪽 중앙에 남향의 사당이 있고 그 앞쪽, 갓, 앞부분 동쪽 가에 서향의 강당이 있으며 양쪽은 내삼문으로 연결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2칸 맞배지붕의 瓦家로서 앞쪽 3칸을 마루, 뒤쪽 3칸은 방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에 화산서원의 현판이 붙어있고 방에는 황희의 영정과 위패, 홍보신과 황정의 위패 등이 모셔져 있는데 영정은 지방 유형 문화재 제 129호로 지정되었다. 내삼문은 와가 3칸의 솟을 대문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 지붕의 와가로서 뒷 양쪽이 사방 1칸씩의 방, 그 사이의 가운데 1칸과 앞의 3칸이 마루로 나누어 마루는 마치 ㅗ자형을 이루며 ㅗ자 꼭대기의 문은 길에 면하여 출입문이 되고 있다. 마루의 천정에는 상량문이 보이고 벽에는 현판이 있다. 한편 외삼문은 일반 주택의 대문과 같은 쪽대문이다.
1)황방촌영정-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9호(1987.04.28지정)
이 영정은 1474년(세종 6) 황희의 나이 62세 때의 초상이다. 원래는 경북 상주군 모동 수봉리에 위치한 옥동서원에 봉안 되었는바 상주의 황씨 종인이 1844년 복제하여 나누어 받아 화산서원 관리인이 보관해 오다가 1927년 화산서원이 건립되자 화산서원에 보관하였다.
참고-진안군지, 진안군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