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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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산서원(龜山書院)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
   송보산(宋寶山) 김문기(金文起) 송 림(宋 琳)
   1828년(순조 28)
   
   (음)3월 15일
   
구산서원은 1828년(순조 28)에 송보산(宋寶山)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16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949년에 다시 설단(設壇)되어 봉사하다가 1967년에 이르러 중건되었고 1967년에 진안유림의 발의로 김문기(金文起)와 송림(宋琳)이 추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송보산(宋寶山)
퇴휴재 송보산(退休齋 宋寶山)은 김종직의 문인이며 세종조에 등과하여 단종조에 예조판서를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힘썼다.
 
2)김문기(金文起,1399∼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 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3)송림(宋琳)
월계 송림(月溪 宋琳)은 퇴휴재의 5대손으로 효행으로 그 명성이 드높았다.

구산사(龜山祠)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음력 3월 15일에 제향한다. 구산사 아래쪽에는 구산서원이 전면 4칸, 측면 2칸의 함석팔작지붕으로 서있다.


참고-진안군사,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안군 홈페이지http://www.jinan.jeonbu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