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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이희맹(李希孟, 1475~15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부(古阜). 자는 백순(白淳), 호는 익재(益齋). 아버지는 종근(從根)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사림파의 한 사람이다.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문장과 인품으로 명망을 얻었다. 1492년(성종 2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어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직하면서 양민들의 군역이 과중함을 논하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한직에 밀려났다가 조정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1508년(중종 3)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으로 재직하면서 훈구파 대신·공신들의 사치와 횡포를 비판하였다. 1510년 형조참의·좌부승지를 거쳐 관찰사로 나갔고, 1512년 도승지,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고부의 도계사(道溪祠)에 향사되었다. 2)최안(崔安, 1545~1615)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지(士止). 호는 모암(慕菴)이다. 성수침(成守琛)의 문인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아들 경행(敬行)과 함께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명나라 장수에게 보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져 군자감의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선공감직장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난이 평정되자 군량을 관가에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거하였다. 정읍의 도계사(道溪祠)에 배향되었다. 3)김제민(金齊閔, 1527∼159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 할아버지는 보현(溥賢)이고, 아버지는 호(灝)이며, 어머니는 김석옥(金錫沃)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화순현감·순창군수, 1586년 전라도사를 지낸 뒤 병으로 사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대둔산 아래 주둔, 왜군을 맞아 싸웠고, 난이 끝난 뒤 학문연구에 전심하였다.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정통하였고,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타버렸다. 저서로는 ≪오봉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4)김흔(金昕, 1558~1629)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字)가 숙승(叔昇)이고, 호(號)는 학산(鶴山)으로 김제민(金齊閔)의 넷째 아들이며,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창의근왕(倡義勤王)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웅치(熊峙) 싸움에도 나아갔다. 또 장성(長城)에서 창의하여 권율(權慄)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언양(彦陽)을 지켰다. 이 공(功)으로 좌승지(左承旨)의 벼슬이 내려지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도 참여하여 정사근(靖社勤)에 들었다. 나주(羅州) 충열사(忠烈祠))에서 제사(祭祀)를 지낸다. 5)김습(金習, 1574~1638) 자(字)는 계응(季鷹)이며, 호(號)는 안식와(安息窩)이며 의성 김씨이다. 김제민(金齊閔)의 조카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이며, 문장(文章)과 학업(學業)이 크게 나아가니, 사림(士林)이 추중(推重)하였다. 곤궁(困窮)하게 살면서 효성을 다 하여 시묘(侍墓)를 하였고 말과 행동이 정대(正大)하니, 김장생(金長生)이 천거(薦擧)하여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태능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 인조(仁祖) 14년(丙子)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義兵)을 일으키다가 도중에 병으로 집에 돌아 왔고, 1638년인 인조(仁祖) 16년에 세상을 떠났다. 6)김제안(金齊顔, 1530~1594)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학자이다. 의성인(義城人)이며, 호(號)는 죽헌(竹軒)이다. 1530년에 태어났으며, 김제민(金齊閔)의 아우이다.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인(門下人)이며,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여 학문이 깊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설(理氣說)등에 통하였으며, 기대승(奇大升)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며 담논(談論)을 하였다. 형인 제민(齊閔)과 같이 전후(前後)하여 6년 간 시묘(侍墓)하였다. 7)김섬(金暹, 1560~1619) 의성인((義城人)이다. 자(字)는 이승(李昇)이고, 호(號)는 퇴휴재(退休齋)이며, 김제민(金齊閔)의 다섯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과묵하고 경학(經學)의 깊은 뜻을 관통(貫通)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이재(異才)라 여기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리라 했다.임진왜란이 나자 집안일을 보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할머님을 정성껏 봉양(奉養)하여 집안을 잘 지켰고 또 군곡을 모아 아버지의 진영(陣營)에 보내었다. 상(喪)을 당하자 시묘(侍墓)를 정성껏 하였다. 천거(薦擧)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 군자감(軍資監) 부정(副正)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벼슬에서 물러나와 천태산(天台山) 기슭에 집을 지어 퇴휴(退休)라 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 진양성에 온 힘을 다 하였다. 8)김지수(金地粹, 1585∼16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거비(去非), 호는 태천(苔川)·태호(苔湖)·천태산인(天台山人).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제민(齊閔)이고, 아버지는 서(曙)이며, 어머니는 승의랑 정희민(丁希閔)의 딸이다. 1616년(광해군 8)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교서관교감(校書館校勘)에 올랐다. 1617년 기자헌(奇自獻)·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해 회령·경원으로 귀양 갈 때 그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정자(正字) 및 예조·병조의 낭관을 지냈다. 1626년 서장관이 되어 정사 김상헌(金尙憲)을 따라 명나라에 가는 도중 부벽루에 제(題)한 시를 보고 감탄, 연로에서 수창(酬唱)한 시를 엮어 ≪조천록 朝天錄≫을 펴냈으며, 이를 본 명나라 사람들이 경모해 마지않았다. 뒤에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시강원의 문학·필선(弼善)·보덕(輔德)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다. 1628년 종성부사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때 송광유(宋光裕)의 무고한 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고부(古阜)로 돌아갔다. 그는 청나라가 새롭게 일어나는 현실에서 존주사상(尊周思想)에 철저했던 인물로, 늙어서는 천태산 밑에 집을 짓고 풍류와 독서로 소일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향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열과 성을 다해 처리했으며, 사람을 대함에 항상 온유하였다. 또한, 매사에 의리를 제일로 삼아 고매한 인격으로 명망을 얻은 당대의 인물이었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부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 3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