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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정읍시 풍소동 점암마을 2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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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박세경(朴世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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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숙종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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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3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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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이 1687년(숙종 15) 정읍에서 사약(賜藥)한 후 1693년(숙종 19) 고암서원을 창건하여 175년간 향사하여 오던 중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당초의 사우가 훼철되었다. 85년 후인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삼년간에 유림들의 발기추진(發起推進)으로 호남의 사대향교(四大鄕校)와 성균관에 통문을 내어 답통(答通)을 접수, 1958년 10월 25일에 송시열을 주벽으로 박세경(朴世經)을 배향으로 위패를 봉안하고 노양서원이라 하였으며 강당은 산앙재(山仰齋)라 편액하였고, 1962년3월 10일에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992년에 사우를, 1993년에 내삼문을 1996년에 강당을 1998년에 관리사(管理舍)를 각각 해체 중건 및 이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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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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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건물은 사우(전면3칸, 측면삼칸의 맞배지붕), 내삼문(전면삼칸, 측면삼칸), 강당(전면삼칸, 측면삼칸), 관리사로 이루어져 있다. 1992년 사우를 해체 복원하였고 1993년 내삼간을 해체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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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정읍시사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사우대관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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