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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이문정(李文挺) 고려 말 공민왕 때 정당문학(正堂文學)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대(文學臺)라는 강당을 건립하여 후배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문정은 나라가 숭불(崇佛)하여 학교를 폐하니 공(公)이 항의하는 소를 올려서 학교를 부활하였다. 2)이백유(李伯由, ?∼139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개국공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몽(蒙)이고,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1371년(공민왕 20)에 문과 동진사(同進士 : 丙科에 해당) 제7위로 급제, 1389년(공양왕 1) 문하부태상시(門下府太常侍)에 이르렀다. 1392년 예조판서를 지내고 그 해 7월 배극렴(裵克廉)·남은(南誾)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공으로 개국공신에 책립되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지목되어 관작과 공신의 칭호를 삭탈당하고,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죽은 뒤에 부분 복권되어 양후(良厚)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왕조의 건국에 핵심세력이 된 신진사대부의 한 사람이었으나 권력재편과정에서 축출되었다. 3)이경동(李瓊仝,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옥여(玉汝). 정당문학 문정(文挺)의 후손이며, 몽(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유(仲由)이고, 아버지는 안동판관 달성(達城)이며, 어머니는 이종미(李種彌)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예문관 겸 예문에 제수되었다. 1466년 예문관대교로서 발영시(拔英試)에 응시, 시부에서 최우수의 실력을 보여 세조의 신임을 얻고 선전관(宣傳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북정록 北征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종 때는 예조정랑·승문원교리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1) 알성시에서 시부에 장원하였다. 1474년(성종 5)부터는 사헌부로 옮겨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면서 관기 확립과 민폐 시정 등에 노력하였다. 특히, 포도수령(捕盜守令)의 논상법(論賞法)을 성문화했고, 조세 부과에 있어 연분법(年分法)의 불합리성을 시정하였다. 1475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77년에는 왜인의 동태에 유의할 것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임사홍(任士洪)의 횡포를 견제했고, 내수사 장리(長利)로 인한 민폐를 시정하였다. 그 뒤 승정원으로 옮겨 성종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보필하였다. 1479년 왕비 윤씨의 폐위에 반대했으나,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당시 현직 승지라고 해 직첩을 회수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다스리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호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83년 ≪강목신증 綱目新增≫을 왕명으로 찬술했고, 1486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였다. 4)이목(李穆, 1471∼149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옹(中雍), 호는 한재(寒齋). 개국공신 백유(伯由)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윤생(閏生)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14세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한 뒤로 학문이 크게 성취되어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는 동문수학한 관계이다. 1489년(성종 20)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는데, 언론이 정중하고 의기(義氣)가 준엄해 동료들의 많은 추앙을 받았다. 1490년 성종이 병환에 있을 때 대비가 무당을 시켜 성균관 벽송정(碧松亭)에 음사를 설치하고 굿을 하자 유생들과 함께 제단을 부수고 무당을 쫓아내니, 대비가 대노해 성종에게 고했으나 얼마 뒤 성종은 유생들을 처벌하지 않고, 성균관 대사성을 불러 “그대가 학생들을 인도해 사습(士習)을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노라.”하고 어주(御酒)까지 하사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전적(成均典籍)이 되었고,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496년 영안남도(永安南道: 지금의 함경남도) 병마평사(兵馬評事)를 거쳐 다음해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때 훈구파의 모함으로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연루되어 김굉필·정여창·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신원되었다. 1552년(명종 7)에 이조참판, 1707년(숙종 33)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절의(節義)에 투철하고 시부(詩賦)에 능하였다. 특히 <다부 茶賦>를 지어 차의 미묘한 미각이 주는 오공(五功)·육덕(六德)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전라북도 전주의 황강사(黃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재문집 寒齋文集≫·≪이평사집 李評事集≫이 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5)이덕린(李德隣) 조선 전기의 효자, 호는 금곡, 본관은 전주, 백유(伯由)의 5세손, 인조 때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6)강해우(姜海遇)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호는 졸암(拙菴), 본관은 진주, 이기발(李起浡)의 문인이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뒤 거업(擧業)을 그만두고 학문에만 열중하니 스승 서귀(西歸)가 그의 정사에 졸암(拙菴)이라 이름 지어 걸어 주었다. 뒤에 의금부 도사의 증직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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