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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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산서원(華山書院)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이언적(李彦迪) 송인수(宋麟壽) 육대춘(陸大春)
   1580년(선조 13)
   1662년(현종 3)
   (음)3월 22일
   화산서원비-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4호(1984.04.01지정)
화산서원은 전라북도에서는 가장 오래 된 서원으로, 1580년(선조 13)에 전주 사람들이 건립하였으며, 중종 때 전주부윤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언적(李彦迪), 송인수(宋麟壽) 등을 봉사(奉祀)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사액되고 왕명으로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쓴 묘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영조 때의 서원 정비와 고종 때의 흥선 대원군에 의한 서원 폐지 조치로 건물이 철거되었고, 1988년에 전라북도내 유림들의 발의와 옥천 육씨 경암공파 본손들의 협조로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사우를 이전 중건하기로 발의하여 1994년에 현위치에 완공되었다.
영조·대원군이 많은 서원을 철폐 정비한 까닭에 서원 자리에는 비를 세워, 그 흔적을 후세인에게 전하고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였다.

1)주벽-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 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개 남겼다. ≪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 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던 것이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 태도에 비해 매우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이 저술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경(九經: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 뒷날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 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 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27세에 지은 <오잠 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2)송인수(宋麟壽, 1499∼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또는 태수(台叟), 호는 규암(圭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계사(繼祀)의 현손이며, 정랑 순년(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여해(汝諧)이고, 아버지는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세량(世良)이다.어머니는 유승양(柳承陽)의 딸이다.
진사(進士) 엄용공(嚴用恭)에게 배웠고, 김안국(金安國)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 때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장악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인사 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전경(典經)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연에 참여했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南平縣監) 유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白仁傑)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런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던 중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 되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규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육대춘(陸大春)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건중 호는 경암 본관은 옥천, 1517년(中宗 12) 시형의 아들로 전주에서 출생. 학문에 뜻을 두고 책을 끼고 입산하여 문장이 대성하였다. 1546년(明宗 1) 에 문과에 급제, 부모봉양을 원하여 명종이 근읍의 수령으로 특제하여 광양, 만경, 고부군수를 역임했는데, 선치하고 흥학에 힘써 고을이 안온하였다. 뒤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을 때 상으로 금은보화를 뇌물로 주는데 곤란해하니 중국인이 그의 청렴에 흠탄하였다 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언적과 도의로 교유하였는데 언적은 그의 학행이 순정함을 칭찬하였다. 이 인록으로 뒤에 추배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전면 3칸, 측면 1칸), 강당(전면 4칸, 측면 3칸), 내외삼문(각 3칸)이 있다.
1)화산서원비-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4호(1984.04.01지정)
전북지방에서는 최고(最古)의 서원으로 이 자리에 향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교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영조·대원군이 많은 서원을 철폐 정비한 까닭에 서원 자리에는 비를 세워, 그 흔적을 후세인에게 전하고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송준길이 서(書)하였다.
참고-전북문화재대관(1997)
전북향교원우대관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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