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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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창계서원(滄溪書院)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
   황 희(黃 喜) 황수신(黃守身) 유호인(兪好仁) 장응두(張應斗) 강백진(康伯珍)
   1695년(숙종 21)
   
   7월 10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36호(1984.04.01지정)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에 있으며 이 서원을 굽어다 보는 옛 장수현의 내위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요 학자인 황희(黃喜)의 유덕을 흠모하여 세웠으니 선생의 출생지를 기념하는 뜻도 함께 새겨진 것이다.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었으며 황희를 주벽으로 모시고 선생의 둘째아들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열성공나부(烈成公懦夫) 황수신(黃守身), 성종 때의 문장삼절(文章三絶)인 유호인(兪好仁),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지조를 지키다가 적소에서 작고한 장응두(張應斗)의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거하였고 1958년 향유의 발의에 의하여 복설하였다.
이 서원은 장수군내에는 가장 오래된 서원이며 고을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이조연간을 통하여 사액의 요청하는 소장을 10여 번 올렸으나 항시 거절당하고 말았으니 대표적인 서원이 향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968년에 강백진(康伯珍)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황희(黃喜, 1363∼145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 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2)황수신(黃守身, 1407∼146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수효(秀孝 : 세종실록에는 季孝로 되어 있음.), 호는 나부(懦夫). 균비(均庇)의 증손으로,할아버지는 강릉대도호부사 군서(君瑞)이고, 아버지는 세종조의 명상 영의정부사 희(喜)이며, 어머니는 양진(楊震)의 딸이다. 판서 치신(致身)의 아우이다.
1423년(세종 5)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학문이 부진하다고 시관(試官)에게 욕을 당하고는 발분해 학문에 진력하였다. 문음으로 종묘부승(宗廟副丞)·종부시직장·사헌부감찰등을 역임하였다.
1429년 7월 지평·호조정랑 등을 거쳐 사재감부정을 지냈다. 그리고 1432년 경기도관찰사 권제(權踶)의 요청에 의해 경력(經歷)을 역임하였다. 장령 재직시에는 도성 내에서 인간의 화복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심을 현혹시키는 요무(妖巫)를 성 밖으로 방출하였다.
1440년 사섬시윤을 거쳐, 그 해 전라도경차관이 되어 함길도 5진(五鎭)을 충실히 하기 위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민호를 사민(徙民)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그 뒤 조정으로 돌아와 지사간원사를 지냈다.
지형조사로 자리를 옮겨서는 수년간에 걸쳐 결단하기 어려운 옥송을 처결하였다. 1441년 첨지중추원사, 1442년 겸지병조사, 1443년 우부승지에 올랐다. 또한 좌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446년에는 국초 이래로 문과출신이 아니면 제수되지 못한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친분이 있는 임원준(任元濬)을 의서찬집관(醫書撰集官)으로 부정 발탁한 것이 적발되면서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1448년 직첩을 환급받고, 1450년(문종 즉위년) 5월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었다.
그 해 문종의 특명으로 병조의 습진(習陣) 및 군사검찰(軍士檢察)의 논의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진법의 상정(詳定)에 공헌하였다.
그 뒤 아버지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1452년(단종 즉위년) 기복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한성부윤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1455년(세조 1) 우참찬으로 소환되었다. 그 때 관찰사 재직 시에 작성한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의 지도를 올리면서 비방책(備防策)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세조 등극에 끼친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어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56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1457년에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우찬성에 오른 뒤, 판예조사를 겸임하면서 예조를 지휘하였다. 1458년 좌찬성, 1459년 1월과 12월 양차에 걸쳐 충청도도순문진휼사(忠淸道都巡問賑恤使)와 경상도모민체찰사(慶尙道募民體察使)로 파견되었다.
그 뒤 귀환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자되면서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462년 아산의 전지를 무단 점거했다고 여러 차례 탄핵되었으나, 용서를 받고 유임되었다. 같은 해 좌찬성으로서 ≪경국대전≫의 제2차 초안(草案) 작성에 참여했으며, 우의정이 되어 명나라 헌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왔다. 1466년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좌의정 심회(沈澮)와 함께 문과출신이 아니면서도 예문춘추관직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1467년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의 명을 받아 ≪법화경 法華經≫·≪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의 언해(諺解)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1465년에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을 찬진하였다.
풍모가 뛰어나고 인품이 중후하면서도 기국이 있어 세조대의 민심 수습과 치적에 큰 공헌이 있었다.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열성(烈成)이다.
 
3)유호인(兪好仁, 1445∼1494)
조선 전기의 문신·문장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 溪). 음(蔭)의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462년(세조 8)에 생원이 되고, 1474년(성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1480년에 거창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을 지내고, 1486년에 검토관(檢討官)을 거쳐 이듬해≪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490년 ≪유호인시고 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본래 글을 좋아하는 성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에 제향되었다.
 
4)장응두(張應斗)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구례(求禮). 자는 언중(彦仲), 호는 송탄(松灘). 자강(自綱)의 아들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조에 생원 문과하였다.
을묘사화(乙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학문(學問)에만 힘쓰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아들 열(冽)이 호종(扈從)의 공이 있어 뒤에 통덕보조공신(統德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증직되고 수원군(水原君)에 피봉되었다.
 
5)강백진(康伯珍, ?∼150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온(子韞), 호는 무명재(無名齋). 윤리(允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거례(居禮)이고,아버지는 척(惕)이며, 어머니는 김숙자(金淑滋)의 딸이다. 중진(仲珍)은 그의 아우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생질이자 문인이다.
1472년(성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9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함안군수가 되었으며, 재직기간 선정을 베풀어 1493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으로부터 선정사실에 대한 장계(狀啓)로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이 대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할 때 장(杖) 80에 정주로 귀양 가서 봉수(烽燧)의 야역(夜役 : 야간에 불을 피우는 봉수군의 역)을 하였다.
1504년에 무오수죄(戊午受罪 : 무오사화로 죄를 받음)로 외방부처(外方付處)된 사람들의 처리 안이 나와 그는 결국 능지처참되고,아들과 형제들도 결장(決杖 ; 장형을 받음)에다 외방으로 축출 당하였다. 1506년(중종 1)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효량(孝良)이다.

현재는 구 서원 터에 1948년에 세운 비가 남아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상현재(尙賢齋)가 남아있다. 신문(神門)과 강당(講堂), 교직사(校直舍)가 복원되어 있다.
중요물건
황희영정, 창계서원유지비

참고-